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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Oct 02. 2024

백마   

 백마      


 갑자기 내 방안에 희디흰 말 한 마리 들어오면 어쩌나 말이 방안을 꽉 채워 들어앉으면 어쩌나 말이 그 큰 눈동자 안에 나를 집어넣고 꺼내놓지 않으면 어쩌나 (…) 지금껏 말 한마디 못하고 백마 한 마리 품고 견디는 그녀에게 물으러 가야 하나 어쩌나 여기는 내 방인데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게스리 말 한 마리 우두커니 서 있으니 어쩌나       


 - 김혜순, <백마> 부분            



 얼마 전에 공부 모임의 한 회원과 상담을 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 어떡하면 좋죠?”     


 아득해졌다. ‘아, 정말 어떡하면 좋은가? 백마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왔는데….’ 우리 사회는 가부장 사회다.     

 가부장 사회는 기본적으로 일부다처제다. 남녀평등이 되었다고 하지만, 많은 면에서 남편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오랫동안 주부로 살아온 그녀는 경제력이 없다. 주부로서 한 일들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정을 경영해온 활동을 돈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주부에게는 빠듯한 생활비가 전부다.     


 그녀는 남편의 불륜 현장을 잡겠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남편의 불륜 현장을 잡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녀는 분노에 차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나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만 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녀는 현장을 잡았다고 했다. “그런데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이제는 남편이 공공연하게 바람을 피워요.”     


 아, 백마가 그녀의 방을 다 차지해 버린 것이다. 모든 여성의 마음의 방에는 백마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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