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 김희재
소설을 읽다 보면 휘몰아치는 전개 속 등장인물에게도 나와 비슷하거나, 혹은 똑 닮은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굳이 이입하려는 게 아니라 문득 어느 구절에 이르러, 와 나랑 똑같아 소오름, 하며 눈이 댕그랗게 커지는 순간이. 그 순간이 이제 그 인물의 밝은 부분이 아니라 어두운 면일 때도 그렇다. 외려 그늘진 부분에서 등장인물과 비슷한 점이 발견되면 아이러니하게 약간 안도한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고
그런데 이 감정은 금세 전복되고 만다. 소설 속 등장인물 대부분은 나보다 힘이 세고, 보통 용기 있고, 끝내 나아간다. 결국 나와 다른 모습에 실망하냐고? 전혀. 오히려 좋다. 그래서 더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데 너는 어때? 나는 이렇게 할 건데 너는 어떻게 할래? 의 무수한 질문의 답을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나보다 좀 더 용기 있게, 기세 좋게, 보란 듯이 보여주고 마니까. 그러니 결말에 이르러 내게 닿은 완전한 전복이 아쉬울 리 없다. ‘이를테면(이 나온 소설 속 상황에서도 고개를 연신 주억인 게 바로 나다)’ 이 소설이, 이 책의 무지막지한 제목이 내게 닿아, 그 의미가 완벽히 전복된 것과 같이
<탱크>라는 소설을 읽게 된 건 이 책을 발견하고도 두어 번 지나친 때다. 한겨레문학상 타이틀이 붙은 이 책을 언젠간 읽게 되었겠지만 처음 봤을 땐 확신의 ‘아니요’였다. 판형도 넓적해서 익숙하지 않았고(실제 꽤 크고 반면 의외로 가볍다), 제목도 좀 그랬다.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예상이 1도 안 되는 제목이랄까. <탱크>라는 단어가 익숙하긴 해도, 익숙해져선 안될 금기의 단어 같았으니까. 두 번째 만났을 땐, 오히려 그 지점이 나를 확신에 들게 했다. 나를 집어. 나를 읽어. 궁금하지 않아? <탱크>라는 무시무시한 제목과는 다르게 표지 그림에는 어딘지 모르게 적막해 보이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소설은 결국 한 사람을 에워싼 인물들인 도선과 양우, 손부경과 황영경, 강규산 그 각각의 이야기이자, 그들이 에워싼 한 사람, 둡둡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도선이 의도치 않게 최초 목도하게 된 둡둡의 점화로 발발된 일련의 사건이자, 양우가 간발의 차로 놓친 둡둡과 본인의 숨이고, 탱크를 한국에 태초로 설계한 황영경의 맹목적 믿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설계를 유지해 온 손부경의 근본적 믿음의 파탄이 불러온, 이 모든 게 다시 둡둡의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절망으로 자리 잡아, 결국 둡둡을 몹시 사랑하지만 미쳐 표현하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 강규산에게로 끝내 가 닿은 완전하게 전복된 믿음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책을 읽는 내 탱크라는 그 물체가, 그 공간이 바로 눈앞에 놓인 것 같아 숨이 멈춰지는 기분이 종종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세상과 사람 그 무엇이든 혹은 둘 다였든 간에 숨을 쉬게, 숨이 들게 하는 공간이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내게는 탱크라는 이름 아래 빠져나올 수 없는, 외려 세상과 사람을 지우고는 살아갈 수 없는 불가항력을 역이용해 인물들을 더 고립시켜 종국에는 극한의 고독만을 안긴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직육면체의 날카로운 철근 상자에 사방이 어둠으로 막혀 홀로 고독히 앉아 위안이나 구원을 얻는다니.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것이다. 세상의 소요를 등지고 철저한 고독으로 구원이 시작될 수 있을까? 세상살이 독고다이면 물론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우린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그게 자신을 구할 영원하고 지속적인 평화가 아니리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탱크>의 등장인물 면면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심지어 황영경이 탱크를 세운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으니까. 오히려 가장 슬펐던 건 둡둡과 강규산의 관계성이었다. 물론 둡둡이 단숨에, 한방에 탱크로부터의 구원을 바랐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강규산 또한 결말을 예상하고 그의 하나뿐인 아들을 외면했을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그 둘의 서로를 향한 침묵이, 결국 둘 앞에 암흑으로 치닿는 전복으로 마주하리라 정말 짐작하지 못했던 걸까. 너무, 너무, 너무 슬퍼 울었다
그러니까 소설 <탱크>는 도선과 양우, 손부경과 황영경, 강규산과 둡둡의 이야기이자 나, 우리의 이야기가 확실하다. 우리 모두 유형이든 무형이든 크든 작든 무언가를 갈망하고, 그 갈망이 이뤄지길 간절히 원한다. 그런데 때로, 아니 아주 자주 갈망보다 그 갈망을 애걸할 매개적 대상이 더 우선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망보다 우선 된 ‘들어주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 무언가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때 돌파구는 의외로 금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 유일의 사람으로 인해 단 하나밖에 없던 돌파구가 무참히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좀 더 상냥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나를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는 숨을 쉰다. 나, 너, 우리 모두 우리 앞에 바로 놓인 따뜻하고 환한 출구를 버젓이 두고 탱크 같은 것을 떠올리고, 탱크 따위를 믿고 의지해 어둠으로 파묻힌다면 우린 결국 탱크에 의해 스스로 전복될 것이다. 우린 아직 밝은 곳에 두 다리를 나란히 하고 서 있다. 짙은 어둠 속으로 스스로 파묻히기보다, 한 걸음 더 걸어 나와 바로 앞에 놓인 완전하고 안온한 전복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서로가 완전한 전복이 되기 위해 우린 서로 더 자주 이야기하고, 많이 웃고 많이 울며 그렇게 같이, 숨 쉬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