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을 읽고
찬바람이 옷깃을 스쳐지나갈 이맘때 쯤일거다. 팥앙금이 가득한 붕어빵을 종이봉투에 가득 담고 시린 손을 호호 불던 때가. 붕어빵은 집 앞 정류장에서도 자주 보였던 길거리 간식이었다. 그러나 붕어빵을 파는 가게의 위치를 알려주는 '붕세권' 어플이 나올 정도로 찾아보기 귀한 손님이 되고 말았다. 그 이유인 즉, 코로나19의 여파로 손님이 줄어든 가운데 치솟는 물가로 부담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붕어빵 반죽을 만드는데 필요한 밀가루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수급 불안이 지속되어 올해 3분기 전년 대비 42.7% 상승하였고, 밀의 가격 상승세는 더 가팔라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붕어빵이 틀에 달라붙지 않도록 유지하는 식용유의 3분기 가격은 전년 대비 32.8% 올랐다. 또한 붕어빵 앙금을 만들 때 쓰는 수입산 붉은 팥(40kg)의 도매가격은 평균 27만원으로 집계되었다. 길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서민 음식들이 고물가 영향으로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있었다.
오전 11시에 이른 점심을 먹고 다가오는 수능업무를 정신없이 하고 있었다. 배꼽시계는 벌써 이미 퇴근 시간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마냥 같은 부서의 선생님께서 붕어빵을 사다오신게 아닌가! 말로만 듣던 '붕세권'의 기쁨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갓 만들어 따끈했을 팥앙금은 찬바람이 부는 실온에 견디지 못하고 차갑게 식었지만, 퇴근시간 전까지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구하기 힘들다던 붕어빵을 부서 사람들에게 하나씩 선물하고픈 그 마음이 참 예뻤다. 그 순간, 교무실 책상에 꽂혀있는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한다. 실존론적으로 결핍의 존재인 현대인이 추구하는 것은 사랑의 채움, 곧 사랑의 충만함일 것이다. 세상에서 사랑이라 여기는 사랑의 개념과 기독교의 사랑의 개념은 서로 일치되기가 어렵다. 일반적인 사랑의 개념과 기독교의 사랑의 개념은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중요한 사상이다. 사랑은 의지를 움직이는 내면적 힘이고, 의지가 인간을 뜻한다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의 사랑에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사랑을 통하여, 생명의 재창조, 존재의 연합, 지혜의 거룩성을 회복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가 찾던 행복도 하나님과의 교제의 사랑을 통하여 소유할 수 있었다. (p.8~11)
나는 과연 어떠하였는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사랑을 누리기 이전에 나를 더욱 사랑하고 돌아보는 것에 중심을 두지는 않았던가? 친구들과 주변사람들에게 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시간을 쪼개어 여러가지 활동을 하면서도, 공허감이 느껴졌던 이유를 찾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에서 진정한 행복과 안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본래 무상한 존재로서 시간 속에서 흩어져 있으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결코 행복과 안정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무리 좋게 해주고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유래된 공허감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중략) 인간에게는 무엇을 사랑할 수 있는 의지가 주어져 있는데, 그 의지의 본질은 자유라고 한다. 그는 이 의지의 자유 때문에 존재의 근원과 최고선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도 있다. (p.110)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니! 자유의지를 말로만 듣고 단어로만 알았지 깊이 체험해본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러므로써 내 삶의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거스틴의 사랑의 의미는 의외로 단순하다. 누구를 사랑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랑하는가이다. "사랑은 사랑한 자와 사랑받는 자를 연합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다. (중략) 어거스틴의 사랑의 누림을 즐기는 것이 향유(즐김)이다. 인간의 축복인 자유의지를 누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변모되어 그가 사랑하는 대상과 연합된 관계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존재의 흩어짐에서 한데 모아져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이라도 상대적인 통합, 안정,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p.121)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세상을 수단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시간적인 것을 사용하여 영원한 하나님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p.113)
인간의 축복인 자유의지를 누리는 것, 연합된 관계를 즐기게 된다는 것, 그 뿐만 아니라 붕어빵이라는 국민간식을 만들게 해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로구나!
<TV는 사랑을 싣고>는 1990년대에 방영했던 시사 교양 프로그램이다. 추억 속의 주인공과 평소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주인공을 찾아 만나게 하는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이 되곤 하였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저버린 옛 사랑, 친구, 스승님을 찾아 헤매이던 것은 비단 예전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전화응대를 하다보면 소중한 은사님을 찾는 문의 전화가 걸려오는 일이 때때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의 이웃들과 하나님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랑하고 있었을까? 때로는 지금 닥친 나의 현재 상황이 갈급하여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닥치기 이전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따뜻한 붕어빵 하나로 허기를 달래고픈 마음이 들었다.
<TV는 사랑을 싣고>는 더이상 찾는 이들이 없어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소중한 은사님께 전달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지긋한 연세의 졸업생들이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사랑이, 90년대 그 시절의 붕어빵 속 팥앙금과 같이 느껴졌다. 붕어빵은 더이상 먹고 싶을 때 손쉽게 찾아먹을 수 있는 겨울철 국민 간식이 아니다. 그러나 붕어빵을 만드는 정성스러운 손길과 발걸음을 해주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에 식은 붕어빵 마저도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