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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채록 Oct 22. 2023

다양한 삶과 맛이 있는 22편의 영화

서울국제음식영화제 오감만족 국제단편경선

음식과 영화를 매개로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 소통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서울국제음식영화제가 지난 11일부터 19일까지 아홉 번째 축제를 열었다.


과거 한 차례 이 영화제를 간 적이 있는데, 음식영화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음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고 현장에서 음식도 먹을 수 있어 눈과 귀, 입이 즐거웠던 그런 행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올해는 온라인에서도 영화제 상영작 일부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스트리밍 사이트 ‘비메오’를 통해 국제경쟁 섹션인 ‘오감만족 국제단편경선’에 선정된 22편을 보았다. 편당 결제와 상영작 전체를 볼 수 있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는데 그중 전체를 선택했고, 1주일 동안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전체 러닝타임만 9시간이 넘어 상영작들을 다 보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에 제각각인 상영시간으로 인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한 영화제의 특정 섹션에 있는 작품들을 다 감상해보는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다.


*영화제 홈페이지에 소개된 순서대로 작품을 언급, 기재하였다.


디에고 가예고스, 새로운 길 (2022, 호세 미겔 시스네로스, 파블로 폴레, 15min)

다큐멘터리보다는 캠페인 영상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닝타임 대부분을 셰프들의 인터뷰로 채웠고, 모두들 지속가능성의 중요성만을 설파한다. 처음에는 식물이 아닌 어류를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시스템을 갖춰 신선한 생선을 식탁에 올리려는 노력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메시지 과잉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레스토랑 ‘쏠로(sollo)’가 지속가능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긴 호흡으로 담아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르게 느꼈을지도.


에바의 선택 (2022, 에네코 무루사발 엘레스카노, 10min)

육류 섭취가 금지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극영화로, 육상 코치 롤라는 셰프 카를로스를 통해 소고기를 구해 제자 에바의 성적을 끌어올리려 한다는 내용이다. 육류 섭취가 금지된다? 상상조차 힘든 내용을 다루고자 했던 시도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나 단편에 어울리는 소재 같지는 않다. 또, 고기를 처음 맛본 에바의 감정이나 행동들이 잘 와닿지 않고 느닷없이 끝맺음한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흔적을 찾아서 (2022, 콘스탄사 가르시아스, 10min)

카페에서 만난 여성에게 마음을 뺏긴 남자가 그녀가 두고 간 노트를 전해주기 위해 그림을 단서 삼아 찾아 나선다. 이 작품은 영화보다 홍보영상에 가까워 보였다. 그림 속 장소들에 도착하면 인물보다 여행 프로그램처럼 지역의 풍광을 보여주고, 아름다운 지역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휘슬도그를 돌려줘 (2022, 밥 심슨, 18min)

캐나다의 패스트푸드 업체 A&W의 메뉴 휘슬도그가 단종되자 팬들의 재출시 요구가 이어진다. 핫도그를 향한 마음을 재치있게 표현한 이들과 이를 극대화한 편집에 보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입장에 따라 음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휘슬도그, 그 맛이 궁금해졌다.


안에서 (2022, 페르난다 피네다, 한스 리페, 19min)

전염병으로 인해 안에서만 지내게 된 이들의 모습을 비언어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고립이 이어지며 변화하는 관계의 양상을 인물들의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숙성의 시간 (2022, 조엘 페너, 안나 시그리투르, 19min)

음식이 부패하고 발효, 숙성되는 모습과 퇴비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주는 모습을 저속촬영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그동안 부패한 음식을 보았을 때 불쾌감과 먹을 수 없는 것이란 생각만 들었는데, 누군가에겐 끝이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이 되는 모습을 보며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었다. 한편으론, 일상의 무언가를 새롭게 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가장 무거운 주문 (2023, 피터 뵈빙, 10min)

처음엔 주문받은 대형 케이크를 시간 안에 만들고자 하는 제빵사와 일에 집중 못하고 놀고 싶어하는 조수가 함께 완성해나가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으로 생각했는데, 후반부에 케이크를 주문한 그레타 툰베리가 이 작품의 메시지가 드러난다. 완성된 케이크의 무게는 총 18780kg, 독일에서 매 분 버려지는 음식물의 양과 같다고 한다. 가볍고 재치있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신선함을 느꼈다.


오르투스: 셰프의 정원 (2022, 마엘 에나프, 18min 23s)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클로 데 상스와 정원사 리오넬 페롱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스토랑의 정원이 요리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셰프가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정원을 통해 식물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셰프들의 모습과 자연이 만들어놓은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정원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접시 위의 식사 (2022, 시에칭린, 7min)

자신이 먹은 동물을 닮아가자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식물을 섭취한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인물들의 이성과 욕망 사이의 고뇌, 여기에 반전까지 담아내 놀라움을 자아낸 작품이다.


아버지의 요리책 (2022, 페드로 차베스, 19min 33s)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이어갈 것인지, 꿈을 펼치기 위해 식당을 팔고 LA로 떠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사리크의 이야기.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이자 문화라는 것을 전한다. 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일정 부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거창한 한 끼 (2022, 마팔다 사우게이루, 12min)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작품. 어머니가 요리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작화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영상이었다면 유튜브에서 흔히 볼법한 브이로그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표현방식을 달리하여 작품을 새롭게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채색을 최소화한 간단한 드로잉 또한 독특하게 다가왔다.


카카오의 노래 (2023, 에스라 베잔, 4min 3s)

그림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겨 담아낸 것 같은 작품.


스왈로우 (2022, 나카니시 마이, 22min)

저마다의 욕망이 들끓는 테이블 위에서 펼쳐지는 스릴러.


아빠와 나 (2022, 임위헤이, 19min)

타오보는 수금하러 찾아간 훠궈 식당이 아들의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내용의 극영화. 빌드업이 다소 긴 것이 아쉽지만, 전복의 재미와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먹는다는 것 (2023, 신디 클로디아, 3min 36s)

음식에 대한 감독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애니메이션. 나레이션으로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는 것에 그쳐 아쉬웠다. 먹는 행위에 불편함을 느낀 소녀의 감정을 보다 디테일하게 보여주었으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잘 와닿았을 것 같다.


길가의 연회 (2022, 시호펑, 19min)

대만에는 혼례나 생일 때 거리에 천막을 치고 음식을 대접하는 노면 연회라는 고유의 음식 문화가 있다고 한다. 이런 연회를 진행하는 출장 요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연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이들을 통해 대만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출장 요리사로 일하며 겪는 고충을 들을 수 있었다. 펜데믹 이후 이 문화는 이어지고 있을까? 출장 요식업을 하던 이들은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있을까가 궁금해졌다.


스프링롤의 꿈 (2022, 부마이, 9min 19s)

스프링롤이라는 음식을 통해 베트남의 문화와 가족의 사랑을 담아낸 애니메이션.


밤에 꽃을 따다 (2022, 지안지룬, 14min 56s)

함께 요리하고 먹는 엄마와 아들 이슈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엄마와 함께 하며 아이가 요리를 놀이처럼 여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자연과 어우러진 이들의 일상은 보는 이에게 마음의 휴식을 주었다.


리토 (2021, 사비에르 바우사, 20min)

팬데믹으로 재택근무를 하던 리토, 집 열쇠를 두고 나와 곤란한 상황을 맞는다는 내용의 극영화. 집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던 이가 밖에서 단절된 시간을 보내며 겪게 되는 변화를 시청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집에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전반부엔 통화하는 소리 등 생활소음이 화면을 채웠다면, 밖으로 내던져진 후반부에는 그의 불안함을 대변하듯 심장박동 소리처럼 느껴지는 전자음악이 사용되었다.


오래된 창 (2022, 폴 홀브룩, 17min)

회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한정된 공간, 두 인물의 대화가 작품을 이루는데, 주고받는 말들이 쌓이고 쌓여 공간에 대한 히스토리와 인물들의 관계, 숨겨진 사연과 그 속에 담긴 감정까지 드러낸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었던 설정을 섬세한 연출과 치밀한 시나리오로 관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시켰다.


샬롯과 마늘 (2022, 17min 17s)

다른 문화권인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족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가 비슷한 것 같아 그 점이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수확 (2023, 사무엘 디아스 페르난데스, 12min 44s)

먹거리 접근성이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알 수 있었던 작품이다. 음식은 공동체를 잇는 중요한 매개체라는 것을 전하는 다큐멘터리.


상영작 22편에는 극영화를 비롯해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까지 장르도 다양하고,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다양한 국가의 문화를 만날 수 있어 잘 차려진 성찬을 맛본 것 같다. 음식에 담겨진 저마다의 이야기와 여러 함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영화제 상영작들을 통해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담아내고 지역의 문화를 말해주는 요소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 음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작품들은 놀라움을 주었고, 보는 방식의 변화가 이렇게 새로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2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꼽아본다면 익숙한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한 <숙성의 시간>과 음식에 이렇게 열정적일 수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한 <휘슬도그를 돌려줘>,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준 <접시 위의 식사>,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도 관객을 집중시킨 <오래된 창> 이 네 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내년에도 다양한 삶과 맛이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길 바라며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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