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뮤지션처럼 시작했다--피아니스트 윤홍천
요즘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유명 콩쿠르의 우승자들입니다. 콩쿠르 우승이 연주자의 필수 경력으로 여겨지는 요즘이지만, 연주자로 성공하는 길이 반드시 콩쿠르만은 있는 건 아닙니다. 독일을 거점으로 유럽에서 활발하게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윤홍천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윤홍천은 1982년 서울 태생으로 10대 때 유학길에 올라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했습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 벨기에 국립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솔로 연주와 음반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동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2011년 독일 바이에른주 문화부 장관이 수여하는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고, 현재 소니클래식인터내셔널의 유일한 한국인 전속 아티스트입니다. 뛰어난 테크닉과 섬세한 감성으로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콩쿠르가 아니라면 어떤 길이 있나
그는 2009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박성용영재특별상을 받는 등 콩쿠르에서 입상한 적은 있지만, 우승 경력은 없습니다.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서 한국 리사이틀을 앞둔 피아니스트 윤홍천을 만났는데요, 그는 콩쿠르 우승 경력이 없었던 게 오히려 자신을 이끌어온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콩쿠르 우승을 했다면 커리어를 쌓는 데 도움이 됐을 수도 있는데, 콩쿠르가 안 된 게 또 어떻게 보면 저의 '원동력'이 됐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정말 재능이 많아서 피아노를 쉽게 친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자기 최고 경력은 부조니 콩쿠르에서 4등 했다는 거라고 얘기하곤 했죠.
어찌 보면 콩쿠르 없이 연주 경력 쌓을 수 있으면 그게 사실 가장 자연스러운 거죠. 저는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이 콩쿠르에 너무 의존하고, 그것만 되면 다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좀 아쉬워요."
유명 콩쿠르 우승은 공연장이나 에이전시, 음반사에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직업 연주자로서 커리어를 쌓는 디딤돌이 되죠. 특히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이나 미국에서 '이방인'이라 할 한국인 연주자에게는 콩쿠르가 더욱 중요한 경력으로 여겨집니다. 그럼 콩쿠르를 통하지 않는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요? 윤홍천은 학업이 끝날 때쯤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데모 CD 100장... 인디뮤지션처럼 시작하다
"20대 중반이 되고 공부도 다 끝났고, 독립도 해야 되고, 연주하면서 이걸로 돈을 벌어서 살고 싶은데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아무 고민 없이 피아노를 치다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니까, 결정을 해야 되겠더라고요.
아직도 기억이 나요. 어둑어둑한 숲을 걷다가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니?' 하고 저한테 물어봤거든요. 그날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연습했는데, 연습이 정말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콩쿠르나 연주 일정 잡힌 것 없이 연습하는 게 잘 안 되더라고요. 학교에서 숲을 지나 집에 가야 하는데, 가다가 벤치에 앉아서 고민했어요.
한국에 가야 하나? 미국으로 다시 갈까? 고민하다가 제 자신한테 정말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보니까, 제일 하고 싶은 건 연주였어요. 무대에 서는 게 제일 행복하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무대라도 내가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윤홍천은 조용한 성격이지만, 뭔가 해야겠다 결심하면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과 프로필, 음반을 찍어 음악 산업 관계자들한테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을 때도 자신의 명함과 음반을 돌렸는데, 한국인 대학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는 게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를 후일 관계자로부터 들은 적도 있습니다.
"데모 CD를 한 100개 정도 컴퓨터로 구워가지고 편지 써서 매니지먼트 회사들에 보냈는데, 처음에는 답도 안 오죠. 그런데 그중 한 분이 연락을 주셨어요. 그분이 연결해 주셔서 처음 독일에서 음반을 낼 수 있었죠. 독일에서 작은 에이전시 하는 분인데, 처음에 음반사도 연결시켜 주시고, 평론가분들한테 제 첫 음반을 보내셔서, 제 음반이 뮌헨 바이에른 방송국 라디오에서 당 타이손, 블레하츠 같은 사람들하고 비교가 되면서 소개가 됐어요."
"데모 CD는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연주회 때 라이브로 한 거나 콩쿠르 때 연주한 것들이에요."
"컴필레이션이네요. 딱 인디 뮤지션이네요!"
"네, 근데 외국 친구들은 그렇게 많이 해요."
거장 로린 마젤도 직접 찾아갔다... 뮌헨 필하모닉과 협연
윤홍천은 2014년에는 거장 로린 마젤에게 발탁되어 뮌헨 필하모닉과 협연하게 됩니다. 그가 독일 하노버 음대를 졸업하고 뮌헨에서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기회도 그가 직접 부딪혀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2013년에 로린 마젤이 뮌헨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오셨어요. 근데 공연을 보러 가면 제 나이 또래 음악 하는 친구들, 지휘자들이 다 무대 뒤로 가더라고요. 만나고 싶으니까요. 로린 마젤과 카라얀이 젊은 음악가들을 많이 발탁했잖아요. 제가 초등학생인가 중학생인가 어릴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처음 봤던 로린 마젤의 베토벤 교향곡 3번이 딱 생각이 나면서, '나는 왜 그렇게 못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분한테 손편지를 써서 음반하고 같이 오케스트라 주소로 보냈어요. 그리고 몇 개월 지나서 찾아간 거죠."
"오라고 해서 가신 거예요?"
"아니죠. 사실 답이 없었어요. 그때는 저한테 매니저가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했더니 '지휘자는 그냥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하더라고요. 그래서 로린 마젤 공연에 갔는데, 언제 찾아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1부 끝나고 (중간 휴식시간에) 찾아가면 사람들이 제일 없을 것 같더라고요. 2부까지 다 끝나고 가면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1부 협연자가 앙코르 할 때 몰래 나와서 무대 뒤로 갔어요. 노크하고 방에 들어갔더니 '너 누구니?' 그러시더라고요. (웃음) '저는 피아니스트인데 얼마 전에 음반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했더니, '그게 너구나!' 하면서 기억하시더라고요. 음반 들었다고요."
그렇게 해서 윤홍천은 이틀 후 로린 마젤 앞에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디션 본 당일, 다음 시즌에 뮌헨 필하모닉 협연 일정이 잡혔습니다. 정말 비현실적으로 빨리 진행되어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로린 마젤이 그 공연을 5개월 앞둔 2014년 7월 84세로 타계했습니다.
2014년 12월, 윤홍천은 마젤과 약속했던 대로 뮌헨 필하모닉과의 협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협연곡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로린 마젤을 대신해 핀란드 태생의 젊은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2021년부터 KBS 교향악단 음악감독을 맡아 한국 관객들에게도 친숙하죠)이 지휘봉을 들었고, 협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윤홍천은 '저는 뭐든 쉽게 되는 건 없었던 것 같다'면서 웃었습니다. 로린 마젤이 타계하지 않고 함께 연주할 수 있었다면 더 좋은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오기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갔고, 오롯이 자신의 실력으로 만들어낸 기회였기에 더욱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는 무시당한다?
윤홍천은 협연은 물론이고 독주와 실내악 등 꾸준하고 다양한 음반 녹음으로 주목받아 온 연주자입니다. 2011년 독일 바이에른주 문화부의 '젊은 예술가상'은 슈베르트 소나타 음반으로 받았고, 2016년 자비네 마이어 등과 함께 녹음한 실내악 음반 '모차르트 위드 프렌드'는 에코클래식 상을 받았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전곡을 녹음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음반은 영국 그라모폰의 '에디터스 초이스'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또 소니뮤직에서 2020년부터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시작해, 3년 만에 완간했습니다. 가장 최근인 올해 나온 음반은 가브리엘 포레와 나디아 불랑제, 레이날도 안의 작품을 담았습니다.
슈베르트 소나타 전곡 음반을 내기도 했지만, 윤홍천은 평소에도 슈베르트를 즐겨 연주하는 '슈베르트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커튼콜을 객원 진행한 SBS 김영욱 PD('피아노홀릭'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기도 합니다)는 '슈베르트 소나타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피아노 배우는 학생들한테 오랜 세월 슈베르트 소나타가 무시당했잖아요. '베토벤 할 시간도 없는데, 언제 이거까지 하고 앉았어' 이런 식으로요. 왜 그랬을까요?" (김영욱 PD)
"저도 어렸을 때는 사실 슈베르트가 지겹고 재미없다고 생각했었어요. 모차르트는 하면 재미있고, 베토벤은 당연히 교과서 같이 배워야 하는 거였고, 그리고 저희 선생님도 슈베르트는 나중에 하면 된다고, 콩쿠르는 베토벤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저도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울 때, 모차르트와 베토벤 소나타만 쳤지 슈베르트 소나타는 쳐본 적이 없습니다. 슈베르트 소나타를 많이 가르치지 않고 많이 치지 않는 것에는, 콩쿠르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던 셈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시 한번 콩쿠르 시스템의 문제점으로 화제가 돌아갔습니다.
콩쿠르는 평균 점수를 올리는 연주를 해야 한다?
"아마추어의 짧은 소견이기는 하지만, 콩쿠르 제도에 대해 저는 약간 걱정이 있는데, 이게 맞는지 여쭤보고 싶었어요. 콩쿠르에는 여러 명의 심사위원이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평균 점수를 올리는 연주를 해야 되잖아요. 거기서 '낭중지추'처럼 연주할 수는 없지 않나요?" (김영욱 PD)
실제로 음악계에서도 이런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가 유명한 사례 중 하나인데요, 이보 포고렐리치는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개성 있는 연주로 최종 결선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졌지만,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그의 탈락에 반발해 심사위원직에서 사퇴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윤홍천은 예전에는 현역 연주자보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심사위원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콩쿠르마다 심사위원이 비슷했지만, 요즘은 바뀌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수뿐 아니라 실제 연주 활동을 하는 연주자나 평론가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심사위원을 구성한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한 콩쿠르의 사례를 소개했는데요, 교수가 아니라 평론가, 매니저, 그리고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로만 심사위원을 채웠지만, 점수를 합산해 평균으로 뽑는 방식의 문제점은 여전했다고 했습니다.
"토론 없이 점수를 딱 매겨서 1등을 발표했는데, 심사위원이 다 놀랐어요. 그 친구를 1등으로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최고점과 최저점 빼고 나머지를 평균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시스템은 어쩔 수 없는 거죠. 어쩌면 음악을 점수로 매기는 게 아이러니인 거죠."
윤홍천은 요즘 후배들한테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 정말 좋은 일이지만, 안 되더라도 길은 많다'라고 조언하고 있다고 합니다. 윤홍천 자신도 어릴 때는 콩쿠르에 맞는 연주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게 후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10대·20대는 정말 여러 작곡가의 작품을 막 해야 되고, 여러 개를 하다가 나중에 자기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건데, 콩쿠르에 맞춰서 연습을 하다 보면 길이 더 좁아지는 거잖아요. 슈베르트가 좋으면 10대에도 슈베르트를 해야 되는데 우선 선생님이 콩쿠르에는 베토벤을 해야 된다고 하니까. 모든 사람이 다 베토벤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베토벤 전집을 낼 수도 없잖아요. 오히려 슈베르트를 더 잘 치고 슈베르트 전집을 하면 뭔가 더 그 사람의 개성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데, 이제 그런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장조와 단조 오가는 슈베르트... 인생도 마찬가지
통영 콘서트홀에서 슈베르트의 후기 소나타를 사흘(10월 11일~13일)에 걸쳐 연주하는 윤홍천은 슈베르트 소나타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는 다 좋고요. 특히 후기 소나타는, 이 사람이 31살에 요절했는데, 마지막 1년 반 동안 정말 여러 명작을 한꺼번에 쏟아냈잖아요. 근데 어떤 곡은 인생의 슬픔을 표현한 것 같고, 어떤 곡은 자연을 표현한 것 같고,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곡을 썼거든요. 곡들이 너무 다른데 그게 너무 대단해요."
윤홍천은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비교했는데요, 베토벤은 예술은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어떤 아이디얼리즘(이상주의)으로 가는 작곡가였다면, 슈베르트는 내 안에서 나오는 노래를 계속 써 내려간 작곡가라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슈베르트는 모차르트와 비슷하다고 했는데요, 두 사람 다 즉흥적으로 계획 없이 곡을 쓰고, 짧은 인생에 정말 많은 곡을 남긴 '악흥'이 가득한 작곡가였다면, 베토벤은 스케치부터 끝까지 계획으로써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가 또 비슷한 게 장조와 단조를 정말 왔다 갔다 너무 잘해요. 그 빛과 어둠 사이를. 그러니까 인생은 음과 양이 다 섞여 있는 것처럼, 하나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잖아요. 그게 되게 인간적이고 저는 그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너무 잘 표현해요."
차분한 어조로 이어지는 윤홍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술가들의 삶도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일컬었는데요, 크고 작은 무대에서 연주하고, 음반 내고, 연주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거죠. 무대에 서서 청중의 박수갈채를 받는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것도 결국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 중 하나인 거잖아요.
윤홍천이 학업을 마칠 즈음 진로가 막막해 고민했고, '진정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자문했다는 이야기,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만들려 했다는 이야기, 콩쿠르에서 우승하지 못한 게 오히려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 길은 하나만이 아니라는 이야기, 저는 음악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모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장조와 단조를 잘 오가는 슈베르트의 음악처럼, 인생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중요한 건 빛이든 어둠이든 매몰되지 않고 나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겠지요. 윤홍천의 슈베르트를 다시 들어봐야겠습니다.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뉴스구독플랫폼 '스프'에 쓴 글 https://premium.sbs.co.kr/article/BLjWswZfx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