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악기점 사장님과 친구가 되다
중국에서 디지털 피아노를 샀지만 한동안 학교 뮤지컬에 출연하는 딸의 노래 연습에 반주해 주고, 디지털 피아노 살 때 달려온 '명곡선' 악보에 있는 곡을 가끔 쳐보는 정도였다. 중국학 석사 과정까지 다니기 시작해 피아노 레슨 받을 엄두는 내지도 못하다가, 영어 강의 수준이 기대 이하였던 중국학 석사 과정에서 중국어 연수 과정으로 바꾸고 나서 조금 여유가 생겼다. 중국어 공부에 집중하면서 중국어로 기본적인 의사 소통은 할 수 있게 되니 중국 피아노 선생님을 한 번 찾아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아이들도 피아노 가르치고, 나도 배워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한국 학부모들이 중국인 피아노 선생님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 했다. 바이올린 전공으로 예술중학교를 다니다 온 아이가 중국인 음대 강사를 소개받았는데, 선생님이 학생보다 더 못 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왕이면 좋은 선생님을 구하고 싶은데 어디서 구하지? 그러다가 음악가인 내 친구가 내가 중국 간다 했더니, 중국에 친한 음대 교수님이 있다며 필요하면 소개해 주겠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바로 친구한테 연락해 봤더니 그 교수님은 교포 음악가인데 베이징에 계신다고 했다. 그래도 칭다오에 아는 피아노 선생님을 연결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한 번 여쭤봐 달라고 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칭다오에 잘 아는 분에게 얘기해 뒀으니 연락해서 '박교수님 소개로 연락하는 아무개'라고 하면 된다고 했다. '왕금옥(王金玉) 회장님'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전달받았다.
왕금옥 회장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중국어 초보인데 바로 전화하는 건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중국 메신저 서비스인 웨이신으로 먼저 연락했더니 답이 왔다. 알고 보니 칭다오 시내에서 큰 악기점을 하는 분이었다. 왕회장님은 모든 메시지를 항상 장미꽃 이모티콘과 두 손 모은 이모티콘으로 마무리했다. 뭔가 중년의 여성 사업가 느낌? 악기점에서 차나 한 잔 같이 하자고 해서 만날 날을 정했다.
드디어 왕회장님을 만나러 간 날, 제과점에 들러 쿠키 선물세트를 하나 사들고 갔다. 초행길이어서 약간 헤맸다. 칭다오 구도심에 위치한 악기점은 건물 밖에 커다란 카라얀 사진을 걸어둔 게 인상적이었다. 들어가니 꽤 큰 매장이다. 가운데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도 있고,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도 있다. 꽤 매장이었다. 점원인 듯한 사람이 나왔다. '왕회장님하고 약속하고 왔는데요' 했더니 잠깐 기다리라 하더니 안쪽 사무실인 듯한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왕회장님 등장! 그런데 앗, 도대체 왜 저런 분이 장미꽃 이모티콘과 두 손 모아 이모티콘을 썼을까. 헐렁한 반바지에 런닝 차림의 아저씨가 나왔다. 나이는 60대쯤 되었을까. '금옥'이라는 이름 때문에 여성일 거라고 생각했고, 카라얀 사진 걸어놓은 클래식 악기점 사장님이면 좀 세련된 분일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했었는데, 그냥 딱 우리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 인상이었다.
인사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정신이 없다. 벽장마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돌덩어리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다. 수석 모으는 취미가 있는 분이었다. 사갖고 간 쿠키선물세트를 '작은 선물이예요' 하고 건넸더니 '고맙다'고 하고는 받자마자 뒤편 소파로 무심하게 툭 던진다. 깜짝 놀랐지만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손짓하더니 수석을 구경하라 한다.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는 콜렉션인 모양이다. 그래서 막 감탄사를 연발하며 (실제로 신기하게 생긴 돌들이 많아서 감탄할 만하기는 했다) 수석 구경을 하고 있는데, 차를 내렸다며 앉아서 마시라고 한다.
앉아서 차를 마시는데, 홀짝 마시면 또 따라주고, 마시면 또 따라주고, 끝없이 차를 마셨다. 왕회장님은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분이었다. 칭다오 사투리가 있어서 절반도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래도 눈치는 늘어서 몇몇 들리는 단어로 대충 짐작하고 열심히 리액션을 해드렸다. 대략 왕회장님이 어떤 분인지는 알게 되었다.
왕회장님은 칭다오에서 클래식 악기상으로 잔뼈가 굵은 분으로, 이 악기점에서 매년 주최하는 어린이 피아노 경연대회가 꽤 전통이 있다 했다. 딸은 관악기(정확하진 않은데 아마도 플루트?) 전공으로 뉴욕 맨하탄 음대 유학을 다녀와 상하이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했더니 중국에 있는 동안 중국 문화도 열심히 배워서 한중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와 거창하다!)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왕회장님은 술은 한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흥이 오르는지 갑자기 시 한 대목을 읊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물론 못 알아들었다.) 그러더니 '적벽부'를 아느냐고 한다. 그게 적벽부였나 보다. 처음에는 전혀 못 알아들었지만, 가만 얘기하는 걸 듣다 보니 삼국지 얘기였다. 많이 잊어버리긴 했지만 한 때 삼국지를 탐독했던 독자로서, 맞장구 정도는 칠 수 있지! 삼국지 좋아한다고 하니 반색을 했다. 나도 언젠가 적벽부를 중국어로 읊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회장님은 어릴 떄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었는데 형편이 안되어 배우지 못했고, 젊은 시절 셰익스피어를 좋아했다고 한다. 집안 환경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문화 방면으로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옆에 마침 중국 악기 얼후가 보여서 '얼후 연주할 줄 아시냐'고 물었더니, 당장 악기를 꺼내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깜짝 놀랐다. 너무 능숙한 솜씨라서.
피아노 선생님 소개해 달라고 간 건데, 정작 용건은 까맣게 잊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왕회장님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화는 끊김없이 잘 이어졌다. 중국어 실력이 갑자기 엄청나게 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앉아있다 일어나려고 할 때쯤, 왕회장님이 말했다.
"피아노는 교수까지는 필요 없겠고, 애들 가르칠 적당한 선생님은 많아요."
"아 근데, 애들만 칠 거 아니고 저도 칠 건데요? 저 피아노 좀 쳤어요."
어떤 곡을 쳤느냐고 물어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쇼팽도 조금 쳤다고 하니, 당장 매장에 있는 피아노를 쳐보라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어색해서 사양했을 텐데, 이미 왕회장님의 얼후 연주까지 들은 판이니 가릴 거 뭐 있어. 그랜드 피아노가 여러 대 있었지만,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 눈을 빛내며 앉았다. 악보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끝까지 외워서 칠 수 있는 쇼팽의 녹턴을 한 곡 쳤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매장에 진열된 지 오래되었는지, 조율 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게 웬 횡재냐! 평생 처음으로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한 곡 제대로 쳐 본 날이 되었다.
"선생님 필요없겠는데? 그냥 여기 와서 마음대로 피아노 쳐요."
"네? 그래도 돼요?"
왕회장은 언제든 와서 마음대로 피아노도 치고 차도 마시고 가라고 했다. 그리고 피아노 선생님은 필요하면 다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악기점을 나서서 집에 오는 길, 혼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중국 생활이 조금 더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