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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육수 Sep 20. 2024

남편의 술주정

달력을 보다가 오늘 날짜에 조그맣게 쓰인 글자를 발견했다.

‘남편 회식’

나는 부리나케 남편한테 카톡을 했다. 오늘 술 적당히 마시라는 메시지에 남편에게서 알겠다는 짧은 답이 왔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지 말라느니, 중간중간 물을 많이 마시라느니, 꺾어서 마시라느니 등 나의 잔소리 카톡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남편은 질렸는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원래 남편은 술주정이 없었다. 술을 많이 마셔도 한번 게워내고 혀 꼬인 소리 몇 마디 하다 픽 쓰러져 잠들었다. 술 마시다 우는 사람을 보면 남편은 진상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남편이 최근 진상짓을 하고 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우는 것이다. 아이처럼 펑펑 우는 남편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도 왜 그런지 알기에 차마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처음 남편이 술 마시고 운 것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였다. 명절이라 고향에서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회포를 풀고 오겠거니 하며 나는 친정에서 아이와 있는데 밤늦게 돌아온 남편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디서 넘어졌는지 무릎에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핸드폰 액정은 박살이 났다. 얼굴에는 콧물인지 침인지 모를 분비물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나의 성화에 남편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있잖아, 나 그거 친구들한테 얘기했다?”

“뭘?”

“그거 있잖아. 우리 애 자폐인 거.”


친구들도 하나둘씩 아이를 가지고 육아를 하면서 술자리에는 당연히 자식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물던 남편을 친구들도 의아하게 여겼던 모양이었다. 친구들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어렵게 말문을 연 남편은 막상 아이의 상태에 대해 오픈하자 술기운인지 뭔지 모를 감정들이 폭발했다고 한다. 꺼이꺼이 우는 남편 앞에서 친구들은 그저 술잔만 기울였다. 다친 건 왜 다쳤냐고 물어보니 울음을 멈추려고 달리다가 길바닥에 대자로 넘어져서 그랬단다. 쓸린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길바닥에 벌러덩 넘어진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면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쓰라렸다.

 

회사에서는 최근 육아휴직 이야기를 꺼내면서 회식 때 자주 울었다. 남편이 지금 회사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쪽은 남자들의 육아휴직이 아직 활성화되어있지 않아 육아휴직을 써야 할 명분을 해명해야 했던 것이다. 아이가 느리고 여건상 쓸 수밖에 없다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해도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울컥했던 모양이다.


우리 아이는 학교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는데 그 버스가 마침 남편 회사 앞을 지나친다.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버스에 탄 아이를 남편이 본 모양이었다. 카톡으로 학교버스 봤다고 하면서 아이가 입에 손을 넣고 가방은 등에 맨 채 어정쩡하게 앉아있었다고 알려줬다. 그때는 남편도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알려줬고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날 남편이 친구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는데 또 술에 잔뜩 절어 있었다. 얼른 옷 벗고 씻으라고 등짝 스매싱을 날리려는데 갑자기 남편이 거실 한가운데 철퍼덕 앉았다. 술 취해서 조는 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남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아까 버스 안에서 봤는데. 우리 준후를 봤는데. 으흐흐흐흑.”


남편은 계속 아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말 그대로 참 서럽게 울었다. 아침에는 별 감정 없이 이야기했지만 남편 눈에는 그때 비친 아이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특수학교 버스에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그랬나 싶기도 하고 우리 애가 왜 저기 앉아있나 싶기도 해서 울었을까.


왜 바보같이 우냐고 묻지 않고 나는 그냥 남편의 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울 수 있을 만큼 실컷 울도록 내버려 뒀다. 저렇게라도 울지 않으면 남편의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려 재로 변할 것 같았다. 이제 받아들일 때도 됐는데 평생 적응하지 못하며 이렇게 숨죽이며 울 것 같았다.


내가 아등바등 치료 알아보고 센터 다닐 때도 남편은 별로 관심 없고 뭘 그런것까지 배우냐며 나에게 핀잔을 줬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도 핸드폰만 들여다봐 저게 무슨 아빤가 싶어 막 화를 낸 적도 있다. 하지만 저렇게 아이 때문에 우는 거 보면 자식걱정 품에 안고 사는 아빠긴 아빠구나 싶다. 남편도 남편 나름대로 가슴에 아들의 아픔을 삭히며 살고 있구나 싶어 안쓰러울 때도 있다.


남편의 술주정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걱정이다. 오늘은 울지 않고 돌아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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