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단톡방에 친구가 메시지를 올렸다.
‘나 둘째 임신했어’
요즘 임신했다는 말을 듣기가 가뭄에 콩 나는 시기이기도 하고 우리 나이가 적지 않은 나이라 더 희귀한 소식이었다. 조용했던 단톡방은 친구의 말에 활성화가 되며 축하한다는 글이 쇄도했고 나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아이를 일찍 낳은 편이라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은 나보다 늦게 아이를 가졌다. 나는 그들의 임신 소식을 듣고 축하해 주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나처럼 너희도 이런 애 낳아야 하는데.’
이런 내 마음에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덮어버리려 했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검게 피어올랐다.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해?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해?
너희도 이렇게 살아봐야 해.
한 친구는 난임으로 몇 년을 몸고생 마음고생하다 몇 차례의 시험관 시술로 어렵게 임신에 성공했는데 태아검사에서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려와는 달리 건강한 아기를 출산했다. 다들 다행이라며 축하해 주었는데 나는 축하의 말을 건네면서 또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에이, 아깝다. 같은 편이 생길 수 있었는데.’
나는 내가 너무 끔찍하고 경멸스러웠다. 어떻게 갓 태어난 생명에게, 그동안 아이가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며 고생한 엄마에게 어떻게 그런 악독한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까.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친구와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한참 나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면서 아기띠를 하고 있는 엄마들을 보면서, 놀이터에서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나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준후가 저러면서 나도 미쳐가고 있나 싶어 억지로 그런 마음이 새어 나오지 않게 꾹꾹 눌렀다. 진심으로 축하해줘야 한다는 의무감때문인지 점점 내 축하는 무미건조해졌고 겉과 속의 간극이 너무나 커 나는 괴로웠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 모순(양귀자) 중에서
너무 불공평해. 불현듯 나는 줄곧 내가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열네 살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 눈부신 안부(백수린) 중에서
이 글귀들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나만 이렇게 느낀 게 아니었구나.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이런 나쁜 마음은 ‘내 안의 악의’지만 ‘그것이 인간’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거구나.
내 주위에 준후와 비슷한 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만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는 걸로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이런 일을 겪으면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아,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어란 위로 아닌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러면서 겪은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고통을 같이 연대하며 살고 싶어서 그랬다. 정말 진심으로 악의적인 마음만으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인정하니 조금씩 나쁜 마음들이 사라졌다. 솔직히 완전히 사라졌다고 당당하게 말할 순 없지만 내 마음을 다독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쁜 마음의 불씨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잉태의 기쁨을 맞이한 친구에게 나는 진심으로 축하를 전했다. 둘째를 가진 친구와 태어날 아기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