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먹던 초록과일들이 생각납니다
흔히 동남아 지역에 산다고 하면 열대과일을 많이 먹어서 좋겠다고 한다. 속살이 노랗고 부드러운 망고, 까만 씨가 수없이 박혀있는 빨간 용과, 속살이 하얀 망고스틴, 주홍빛 파파야,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수박 등. 과일을 좋아하는 나에게 베트남(남부)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일의 배신
하지만 과일도 많이 먹으면 살찐다. 과일은 살 안 쪄요가 거짓인 걸 이제는 잘 안다. 호치민에 이주하고 살이 쪘다면 원인은 맥주와 열대과일일 가능성이 높다. 무더운 날씨를 피해 새콤달콤한 과일과 얼음을 넣은 시원한 맥주를 마시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둥글둥글 순둥하게 바뀌어 있다. 그땐 몰랐지만, 요즘 유행하는 혈당조절 다이어트에 따르면, 과일은 혈당스파이크를 높이는 주범이다. 특히 열대과일은 다이어트에 관한 한 유죄다.
현지인들도 분명 우리처럼 달달한 열대 과일을 먹을 텐데, 살은 왜 나만 찌는 걸까. 알고 보니 같은 과일이라도 먹는 방법이 달랐다. 현지인들은 노랗게 익은 망고보다는 풋맛이 나는 그린망고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익지도 않은 망고가 무슨 맛이 있겠냐 싶지만, 풋내 나는 그린 망고를 양념소금에 찍어 먹으면 자꾸만 손이 간다. 그렇게 그린 망고를 생으로도 먹고, 샐러드로 만들어서 먹는다. 물론 노랗게 잘 익은 망고를 먹기도 하지만, 스무디로 더 많이 먹는 것 같다. 알고 보니 초록색일 때 먹는 그린 망고는 덜 익었다기보다는 그렇게 먹는 품종이었다. 노랗게 익었을 때 먹는 망고는 또 다른 품종이었다. 기회가 닿으면 베트남 망고 이야기도 풀어봐야겠다.
아무래도 베트남 현지인들은 알록달록한 잘 익어서 단내를 풍기는 과일보다는 푸릇푸릇한 과일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홈쇼핑에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며 유명 가수가 나와서 광고하던 풋사과 성분의 다이어트제품이 떠오른다. 그래서 베트남 여자들이 날씬한가? 하지만 잘 익어서 향긋하고 새콤달콤 부드러운 과일의 맛을 나는 이미 알아버린 것을. 그냥 눈을 감아 버리기로 했다.
덜 익은 과일이 아니어도 베트남에서만 만날 수 있는 초록색 과일들이 있다. 초록 바나나, 초록 오렌지, 초록 망고. 초록 아보카도 등이다. 노랗게 잘 익었을 때 먹는 망고도 있지만, 알고 보니 초록색일 때 먹는 망고의 종류는 따로 있었고, 겉은 초록인데 속은 노랗게 익어서 주스를 만들어 먹는 초록색 오렌지도 있다. 현지인이 사과(cây táo ta)라고 부르는 초록 과일은 알고 보니 대추였다. 대추도 푸릇푸릇할 때 양념소금에 찍어 먹는다. 파파야는 잘 익었을 때도 먹지만, 푸른색일 때는 채쳐서 샐러드로 만들거나, 살짝 익어서 노란빛을 내기 시작하면 피클처럼 절임을 만들어 먹는다. 초록이 식욕을 떨어트리는 색이라지만 베트남에선 초록색 과일도 맛이 있다.
처음 봤을 땐 익지도 않은 바나나를 파나 했는데, 품종 자체가 초록색이었다. 이런 바나나는 후숙을 하면 노란빛을 띠는 초록색으로 바뀐다. 새파란 바나나를 한 손 사다가 며칠 실온에서 후숙을 시키면 껍질이 말랑해져서 껍질도 잘 까지고, 과육은 엄청 달콤하다. 베트남에서 제대로 후숙 된 초록 바나나를 먹고 나서는 마트에서 비싼 돌(Dole) 바나나를 더 이상 사지 않게 되었다. 초록바나나가 가격도 더 저렴하고, 더 달콤한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바나나 한 손을 사서 주방 선반에 두면 자연스레 후숙이 되고, 아이들도 이제 잘 알아서 노란빛이 되면 하나씩 떼서 먹는다. 이제 우리 가족에게 초록 바나나는 덜 익은 바나나가 아니라, 더 맛있는 바나나다. 초록색 바나나도 종류가 두 종류 정도 있다. 겉에 허옇게 뭔가 낀 것 같고 투박하게 생긴 바나나와 매끈하게 잘 빠진 바나나도 있는데, 생으로 먹기엔 아무래도 매끈한 바나나가 더 나아 보였다. 현지인이 투박한 바나나를 송이째 선물해서 먹어봤는데, 이것도 후숙 하니 엄청 달았다.
베트남에선 덜 익은 바나나도 요리를 해서 먹는다. 숯불에 구운 바나나, 튀긴 바나나가 있는데 가끔 먹어보면 별미인데, 많이는 못 먹겠더라. 덜 익은 바나나를 얇게 썰어서 쌈채소, 향채, 스타프룻 등과 함께 싸 먹기도 하는데, 그 텁텁하면서 싱그러운 맛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초록 아보카도, 초록 바나나에 이어 베트남에는 초록 과일이 또 있다. 겉도 속도 초록색인 청귤 같은 애들이 아니라, 겉은 초록이지만 속은 주황빛깔인 초록 오렌지다. 간혹 보이는 주홍색 오렌지나 귤은 대부분 수입산이다. 길을 걷다 보면 수레 한가득 담겨 있는 초록색 오렌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껍질은 초록색이지만, 안은 주황색으로 과즙이 풍부한 주스용 오렌지다.
길에서 파는 오렌지 주스도 다 이런 오렌지로 만든다. 오렌지 주스 하나에 3~4k동.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거라 맛있다. 물 없이 오렌지 1-2개 착즙 한 오렌지즙을 얼음컵에 담아 주는데, 문제는 얼음이다. 위생이 믿음직스럽지 않은 얼음이지만, 베트남이니까 또 그러려니 한다. 길에서 파는 주스를 마시고 배가 아픈 경험이 있다면 아마 얼음 탓이지 않을까. 근데 또 맛있다. 먹으면서도 불안한 맛있는 불량식품이다.
그래서 오렌지를 사서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1kg 2만 동! 싸긴 또 엄청 싸다. 1kg 사면 4~5개 정도다. 3kg 정도 넉넉하게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렌지를 사서 반을 가르고, 아이들에게 착즙을 시키면 신나서 착즙기에 오렌지를 꾹꾹 누른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어린 노동력을 활용해 홈메이드 착즙 오렌지 주스를 만들었다. 아이들에겐 노동이라기보단 유희에 가깝다. 재미와 주스를 동시에 얻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그렇게 착즙 한 오렌지 주스는 물을 타 먹어도 될 만큼 맛이 진해서 우리 집에선 얼음잔에 탄산수를 섞어서 오렌지에이드로 만들어 먹곤 했었다.
물론 껍질을 까서 먹는 초록색 오렌지도 있다. 주스용 오렌지보다 껍질이 얇고 맨질맨질하다. 속살도 주스용 오렌지처럼 주홍빛이 아니라 노랑빛에 가깝다. 시기보다는 싱거운 단맛에 가깝다. 베트남에서도 노란 감귤이나 주황색 오렌지가 있긴 하다. 노란 감귤(만다린)은 중국이나 호주산 수입으로 안에 씨가 크다. 그래도 한국에서 겨울에 까먹는 감귤과 맛이 비슷하다. 주황색 오렌지도 수입산이다. 레드 오렌지도 수입. 베트남산 오렌지는 초록색이다.
처음부터 베트남의 초록빛깔 과일을 먹은 건 아니었다. 알록달록한 열대과일도 차고 넘치는 곳이라, 굳이 현지인들이 먹는 초록빛 과일들을 먹어야 하나 싶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하나둘 초록빛 과일을 하나둘씩 시도해 보기 시작했는데,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초록 아보카도와 초록바나나를 사서 후숙을 시키고, 아삭아삭 그린 망고도 양념소금에 찍어 먹고, 초록빛 오렌지로 착즙 주스도 만들어 먹게 된 것이다. 그리고 초록빛깔 과일들이 더 저렴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가끔은 노란 망고보다는 그린 망고의 아삭아삭한 풋맛이 당길 때가 있고, 풋내 나는 초록바나나의 맛이 생각나기도 한다. 아무래도 베트남에 놀러 갈 때가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