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취준의 시작은 유럽에서 귀국한 지 한달이 된 24년 2월부터였다. 나는 졸업을 미루고 일생일대 버킷리스트였던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졸업이 가까워오기까지 교환학생을 미룬 데에는 긴 이야기가 있다.
처음 교환학생을 계획한 것은 2학년 때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갖고 있던 환상을 5년동안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당시 부모님에게 교환학생을 가고싶다 말씀드렸을 때, 돌아오는 건 결사반대였다. 22살의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미숙했고, 부모님은 교환학생에 대해 잘 모르셨다.
그 때 떠났다면 캐나다를 갔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지금 돌아보니 나이가 어느정도 찬 후에 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 때의 난 호기로움만 가득한 겁쟁이였기에, 얻는 게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반대에 부딪힌 다음 해에 코로나가 터졌다. 독일에 가있던 친구는 당초 계획했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한 학기만에에 돌아와야 했고, 미국으로 가기 위한 서류와 면접을 모두 통과한 친구는 등록을 포기했다. 그렇게 나는 교환학생의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3년 후,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눈에 밟혔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접어놨을 뿐이었단 걸 알았다. 외국에 나가 사는 것이 목표라면 워킹 홀리데이라는 옵션도 있었지만, 그와 교환학생은 나에게 전혀 다른 의미였다. 영영 이루지 못하는 꿈으로 남는 것에 대한 미련이 질겼다. 그렇게 나는 유럽으로 떠났다.
떠나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가 있다. 취업이 1년 늦어져도 문제가 되지 않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학년 무렵 딱 한 자리만 뽑는 전환형 인턴에 합격했다. 부서의 인턴은 나뿐이었고 전환 면접은 사실상 형식이었기에 정직원으로의 전환이 보장된 자리였다.
나는 나를 믿었다. 돌아와서도 다시 취업 시장에 뛰어든다고 해도, 어딘가에는 자리가 있다고, 그 기회를 쟁취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회사를 나가겠습니다, 외쳤다. 남들의 기준에 끌려다니지 않고 원하는 대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겠다 다짐하면서.
이 믿음 덕분에 귀국한 후 다시 취준을 겪으며 나는 평온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만큼. 물론 불안함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롤러코스터가 떨어지기 직전이 긴장되고, 발을 헛디뎠을 때 놀라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딱 그정도였다. 불면을 겪거나 악몽을 꾸거나 스트레스성 질환들이 생기거나 하는 취준생 전형의 모습들이 전혀 발현되지 않았다. 밝았고 긍정적이었다. 역시 나는 굳건한 사람이군, 하는 얕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4년 여름, 졸업을 했다. 직업도 수입원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졸업을 해버렸다. 장장 6년이다. 이렇게까지 학교에 오래 붙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1학년때 술자리에서 오랫동안 학교를 떠나고 있지 못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듣곤했는데 그게 사실은 나였다니.
졸업하는 날은 마음이 참 요란스러웠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정의내릴 수 없는 무언가였다. '남들 다 하는 졸업'이라는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나이도 먹고 졸업도 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내일도 어제처럼 카페로, 도서관으로 출근해 자기소개서를 쓰고 자격증 시험을 공부할 것이다. 어제와 같은, 여유롭고 지루한 나날들의 반복일 뿐이다. 바뀐게 있다면, 이제는 외부인 출입증을 사용해야 한다. 뭐하는 사람이냐는 물음에 학생이라고 답할 수 없다. 온전히 혼자다. 그 사실이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졸업 후 한달, 두달. 거절당한 지원서는 쌓여가고, 자존감은 하루가 다르게 작아졌다. 하반기 공채 시즌을 겪으며 겪으며 진정한 취준생으로 거듭났다. 죄책감도 없이 의심하고 자학하고 한탄했다. 내가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던가? 때로는 굶거나 폭식을 했으며, 불안함에 잠 못 이루는 밤들을 지났다.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