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그 나라에서 히틀러가 그렇게나 애틋하게 사랑했던 자신의 운명은 심지어 자신의 가장 원초적인 꿈에서조차도 가질 수가 없었고 그래서 상상만 했을 뿐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의 국가 재상이 되고는 조금 후까지도 기술적으로는 외국인으로, 독일국 안의 오스트리아 인으로 남아 있었다. 합스부르크 황조가 몰락하기 직전 마지막 10년의 시기에 독일로 온 오스트리아 인으로서, 문명화된 수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편견들과 증오들을 포용하고는 독일어를 말하는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 만연하던 사상들 또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살아가던 그 위대한 도시의 다수가 가진 품위 있고 정직하며 고결함을 이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한 훌륭한 품성을 가진 동료 시민들은 체코인이거나 유태인이거나 독일인이었으며, 그들은 부유할 수도 있었고 가난할 수도 있었으며, 예술가일 수도 있고 훌륭한 장인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히틀러는 자신을 이해 받을 수 있었다. 북쪽에서 온 어떤 독일인이. 서쪽의 라인란트, 동쪽의 프로이센이나 심지어 남쪽의 바이에른에서 온 사람이 자신의 혈통과 정신이 어떤 가능한 경험에서 나오더라도, 정확하게 어떤 요소들의 혼합이 아돌프 히틀러가 결국에 도달한 바로 그 곳까지 이르게 될 수 있었을까. 확실히 하자면 예측 불가능한 천재성의 어떤 자유로운 손길이 한 번 더 가해져야만 가능할 것이었다.
하지만 1913년 봄에 히틀러의 천재성은 아직 보여지지 않았다. 뮌헨에서, 비엔나에서 처럼, 히틀러는 땡전 한 푼 없고, 친구도 없고, 정규적인 직업도 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4년 여름에 전쟁이 일어나서, 다른 수백 만의 남자들처럼 히틀러를 채어가서 음울한 손아귀로 확 던져 넣었다. 8월 3일에 히틀러는 바이에른 왕인 루트비히 3세에세 바바리아 연대에서 자원 근무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탄원했고, 그 신청은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하늘이 보내 준 기회였다. 이제 이 젊은 부랑자는 자신이 말하듯이 그가 믿는 것은 항상 존재 가치를 위한 싸움이라는 것에서 자신을 받아 들여준 국가를 위해서, 즉 자신이 친애하는 독일 제국을 위해서 복무할 자신의 열정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 -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서의 모든 실패와 좌절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히틀러난 나의 투쟁 속에 이렇게 썼다.
"내게는, 바로 그 시간이 내가 어린 시절 동안 엄청난 무게로 나를 짓눌러 왔던 고통으로부터 구조해 주는 것이었다. 내가 그 순간의 열정을 통해 흥분하게 되어져서, 무릎을 꿇고 쓰러져 바로 그러한 때에 살도록 허락해 준 행운을 나에게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가슴 벅찬 채로 하늘에게 고마워했다고 말하는 것이 수치가 아니다. 내게는, 모든 독일인들에게 처럼,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시기가 이제 시작되었다. 이 거대한 투쟁의 순간들과 비교해서 과거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과거는 그 초라함, 외로움, 그리고 실망스러운 순간들과 함께 어둠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그 과거라는 것이 히틀러의 정신과 인성을 이후로 영원히 형성한 것이라고 해도, 히틀러 자신은 그렇게 믿지 않았다. 전쟁은 이제 수백 만명이라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스물 다섯 살의 히틀러에게는 인생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