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균열과 모순'이 있는 도시를 사랑해.
11월 하순, 붉게 관능의 음영감으로 물들였던 낙엽은 한 계절의 소멸을 우수에 찬 서정적 장면으로 나뒹굴었다. 잔뜩 찌푸린 대기에는 우수수 떨어지는 늦가을의 허무조차 담지 못한 애절한 잔향 대신 당장 눈이라도 내릴 듯 묵직한 겨울 기류가 흘러 다닌다. 불쑥 찾아온 스산한 기운에 온기의 저뭄을 인정하면서도 못내 아쉽고 당황스러운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매일의 평범한 일상마저 얼어붙기 시작한 시린 새 계절의 주말 아침, 설핏한 선잠에서 눈을 뜨자마자 나는 또다시 낯선 여행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여행은 단순히 이국의 땅을 밟는 행위가 아닌, 어느덧 무기력해진 삶의 순간을 깨뜨리는 호흡과도 같기에. 차가운 공기에 꽁꽁 폐쇄된 방 안의 창문을 활짝 열어 창백하고 투명한 미립자의 겨울바람을 맞는 순간처럼, 삶이 고여 있을 때 다시 흐르게 하는 가장 비밀스러운 장치가 된다.
당장 떠날 수 없다면, 우리를 달래주는 건 집이라는 일상의 공간에 초대한 지난 여행의 흔적들이다. 그것은 촉감으로 남은 물질의 파편이기도 하고, 빛과 향처럼 무형으로 배어든 기억이기도 하다.
여전히 몽롱한 겨울잠에 취해 복층 침실 계단을 내려오며, 마음이 끄는 음악을 튼다. 오늘은 희뿌염하게 서리낀 유리창 너머 서늘한 서울의 하늘 아래, 박공지붕의 높은 수직적 파사드 아래, 블루지한 재즈가 부유한다. 표면에 부딪히는 청각의 저릿한 파장과 거친 숨결처럼 일렁이는 음률의 진동은, 몽환적이면서도 내 연약한 내면을 어딘가 추상화시킨 느낌을 주기도 한다. 벽에 반사된 섹소폰 선율은 저음의 나즈막한 떨림으로 내 촉감마저 예민하게 자극했다. 아침부터 해질녘 센강의 멜링콜리를 소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아차산을 넘어 동쪽 주방에 막 당도한 아침빛으로, 나른히 깨어난 허브 화분에 생장의 물을 준다. 내 손끝에 뭉개지는 로즈마리와 바질의 알싸한 내음, 그리고 오렌지 향기를 머금은 찬란한 안달루시아의 햇살 한 줌 넣은 물 한잔으로, 내게도 잃어버린 생기를 건넨다. 8월 한낮의 열기에, 고요히 숨죽인 눈부신 하얀 골목을 깨우던 중정의 분수 소리가 졸졸 내 귀를 간지럽힌다. 이번 한 주도 수고했어. 보기보다 더 작고 미약해서 세상의 풍파에 쉬이 상실되어 온 나를 지중해 태양빛에 응축된 청량감으로 다정하게 토닥여주고 싶었다.
발리에서 맡은 달큰한 향내를 기억하며, 거실에 샌달우드 스틱 하나를 피웠다. 가늘게 피어오른 한줄기 선향은 마치 오래된 사원의 기도문이 하늘로 흩어지듯, 공간에 침묵의 여백을 남긴다. 현관에는 따뜻한 흙냄새를 머금은 앰버 노트의 디퓨저를 두었다. 누군가 저 황동벨을 청아하게 울리며 들어서는 순간, 포근한 잔향으로 포옹하듯 건네는 친밀한 환영의 프롤로그이다. 파피루스 룸스프레이를 뿌리자, 작업실에는 페이지마다 사유의 뿌리가 조금 더 단단히 내려앉았다. 고서로 가득 에워싸인 오래된 도서관에 파묻힌 채 지적 탐구에만 몰두하는 고상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으쓱한 기분마저 든다.
잠시 나는 여름 바다향으로 가득 찬 침실에서, 겨울밤을 보내는 기분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이렇게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채집한 낯선 향취로, 집 안 곳곳 고유한 후각을 정성스레 심어주는 일은, 공간의 이동 자체가 여행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향기는 무언의 풍경이었다.
오늘은 가장 좋아하는 향초를 피우고 버블 베스를 해야지. 그 향은 어느 도시를 불러내올까?
가장자리를 따라 입체적인 은세공이 아로새겨진 이 타원형 실버 트레이와, 그 위에 놓인 붉은 작약이 그려진 커피잔과 설탕통은 시칠리아의 벼룩시장에서 보물처럼 달뜨게 발견해 낸 것들이다. ‘앤티크’라는 고상한 호칭으로 불리기에는 조야하고 무용해 보이는,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한낱 잡동사니로 보일 자잘한 장식품들이 소란스레 쌓여 있던 곳. 호기심 반 소유욕 반으로 물건들 사이를 신나게 헤집고 다니던 그때의 묘한 흥분이 고스란히 소환되어, 나를 그 푸르고 황량한 (그러나, 무한히 신비로운) 신화의 섬으로 다시 한번 이끌고 있었다.
여행길에 잠시 벼룩시장에 들러, 내 집으로 들일 여행지의 풍경을 수집해 보는 건 어떨까. 역사적으로 대단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심미안을 발휘한 선택은 그 자체로 근사하다. 보통 벼룩시장에서 산 물건은 장식용 기념품으로 머물다 시간이 지나면 단순한 장식물로 퇴색되기 쉽다. 선반 위에 올려둔 순간 기억은 잠든다. 그러나 손끝에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난다. 생활 속에서 실제로 사용될 때, 매일의 호흡과 동작 속에서 여행이 불려 나오고 추억은 ‘소비’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전환된다.
작은 오브제 하나도 타인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하나의 조각난 역사다. 어쩌면 오래되고 낡은 물건이 주는 쓸쓸함과 고루함이 있을지라도, 숨겨진 물건의 비밀스러운 과거 위에 내 현재의 은밀한 상상이 덧대지고, 집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미래의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 시공간을 초월해 현재의 일상 풍경은 과거의 비일상적 경험이 중첩되는 감각적 미장센이 된다.
온갖 이국적인 것들에 매료된 1900년대 예술가가 파리 아틀리에 안에 자신의 작품과 생경한 타국의 정취를 낭만적으로 녹여냈듯, 나도 지난 여행지에서 모아 온 추억의 산물들로 이 서재를 채웠다. 입구를 들어서며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벽면에는, 우아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미술관에서 가져온 A1사이즈 전시 포스터를 걸어 두었다. 크기가 제각기 다른 액자들도 무심한 척 바닥과 가구에 기대 두면, 금세 갤러리 같은 무드를 자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옆, 곡선형 아치 구조가 고풍스러운 책장 가득 여행의 전리품을 채웠다. 이때 소품들과 더불어 예술서적, 전시 도록, 그림 액자나 미술 엽서 등의 아트오브제 그리고 돌, 나무 한 토막, 드라이플라워 같은 자연의 소재들을 함께 레이어링 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스타일링하는 것이 핵심이다. 펼쳐 둔 화집 옆에 미술 엽서를 세워두고, 황동 촛대 사이로 빛바랜 드라이플라워와 등나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면, 책의 양감 · 엽서의 컬러 · 식물의 곡선이 드리운 그림자가 풍성하게 중첩되며 한 폭의 정물화가 그려진다. 책만, 액자만, 꽃만 따로 놓았을 때는 각각 고립된 아이템에 불과하다. 반면 서로 시선을 주고받게끔 경계를 흐릿하게 지우고 관계성으로 배치될 때, 비로소 나만의 여행 서사가 깃든 스토리텔링이 시작된다.
고색창연한 미술관에서의 비일상적인 예술 경험을 나의 집에서 다시금 재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집은 곧 자기만의 예술을 영위하는 곳, 여행지의 길모퉁이 작은 아틀리에 같은 미학적 현장이다. 숱한 빈티지 오브제의 미감 위로 위대한 예술가들의 지적인 고뇌와 창조력도 함께 중첩될 수 있으면 좋겠다.
거실에 피워 둔 샌달우드 향내가 이곳까지 스며들기 시작한다. 짙은 향이 코끝을 간질이다 저 멀리로 옅어진다. 향이 감돌자 서재는 명상의 기운까지 머금으며, 이전과는 또 다른 치유의 힘을 얻는다. 마치 아득한 과거 속 닿아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국의 도시로부터 오래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내가 여행에서 수집한 사물들이 겹겹이 층위를 이루며 쌓아 올린 긴 시간의 풍경은, 어느새 ‘나’라는 한 사람의 현재에 스며들어 가본 적도 없는 시공간을 그리워하게 만드니까.
소파에 반쯤 기대 누워 낯선 허구의 냄새에 멍하니, 한참을 상념에 젖어들었다. 얼마나 지난 걸까. 그새 창밖 사위도 한 톤 더 낮아져 있다. 겨우 오후 4시지만 겨울의 해는 어둑하고 짧다. 어스름, 벌써부터 저녁이 밀려온다. 이 계절에 해가 진다는 건 회색과 검은색의 그라데이션 속에서 서늘한 푸른빛이 퍼지며 모든 것을 모노톤으로 물들인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태양빛을 잃은 잿빛 실루엣만이 겨울 저녁의 색채였다.
갑자기 노곤하게 한기마저 스미는 듯하다. 이제 슬슬 버블 배쓰를 해볼까.
리스본 언덕의 붉은 지붕 사이를 맴돌던 바닷바람의 짭조름한 향기를 담아, 욕조에 미네랄 솔트와 세이지 오일을 풀었다. 리스본의 애수를 불러내듯, 루비빛 포트 와인에 달큰하고 쌉싸래한 시나몬과 정향, 허브, 레몬을 잔뜩 넣어 뱅쇼를 끓였다.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욕조 곁에 두고 몸을 담그니, 금세 리스본의 해무에 휩싸인 것처럼 온몸이 감미롭게 녹아내린다. 알파마의 좁은 골목에 울려 퍼지던 애잔한 파두 소리마저 욕실 벽면 타일에 응결되어 도르르... 내 살갗을 타고 흐른다. 목욕 후, 커다란 태국 코끼리가 수 놓인 샤워 타올의 도톰한 질감도 내 체온에 온기를 더해 줄 것이다.
겨울 주말, ‘쉼’이라 허락된 시간.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득템해 온 오렌지빛 호박 램프를 밝혀 침실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도, 폭신한 이불에 파묻혀 다음 여행을 꿈꾸게 허는 영감의 책도 놓쳐선 안된다. 바스락 손끝과 귓가로 울리는 종이의 촉감과 소리, 책장을 넘길 때 이는 작은 바람에 전해지는 눅눅한 먼지 냄새, 살포시 기억하려 접어둔 페이지에서 발견한 잊혀졌던 문장들. 일랑이는 촛불에 의지해 읽어 내려가는 한 자 한 자는, 바스러질 듯 메마른 요즈음의 내 마음에 복원해야 할 낭만의 과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 밤은 유난히 깊고 긴 잠이 들 것만 같다. 창밖으로 새어 나가는 그윽한 불빛은 차가운 골목마저 센강의 노을빛 레드로 물들일지 모르겠다.
여행에서 마주친 이국의 감각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여행은 지난여름휴가 때 떠난 따스한 남국으로의 천국 같은 힐링일 수도, 유럽 미술관에서의 위대한 예술작품을 마주하던 영혼의 울림일 수도 있다. 그 기억을 아련한 회상으로 남기지 않고 색, 향, 질감, 소리, 맛.... 여행에서 길어 올린 비일상의 오감들을 다시 집이라는 익숙한 세계 안에 조형해 보자.
오브제와 같은 유형의 흔적이 사진처럼 박제된 장면이라면, 무형의 감각은 시간마다 바뀌며 집 안에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여행이 될 수 있다. 한 해의 끝자락, 저마다의 내밀하고 소중한 여행의 흔적을 곁에 두고 한껏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내 보는 건 어떨까. 그럼 여행은 끝나지 않고 정서적 회복과 치유(retreat)의 장치로, 계속되는 이야기로 오랜 시간 우리에게 남게 될 것이다.
“당신의 공간에 새기고 싶은 여행지의 한 장면은 무엇인가요?”
* 이 글은 2025년 11월 굿웨어몰 매거진에 게재된 콘텐츠의 오리지널 원문 버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