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사랑한 컬러의 역사 (by 데이비드 콜즈)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작품(1665년)을 모티프로 상상을 이미지화한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에는 그리트(스칼렛 요한슨)와 베르메르(콜린 퍼스)가 함께 유화 물감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천연 재료인 그 귀한 보석 '청금석'을 이용해 안료를 만들고, 그것을 곱게 갈아 아마인유를 섞어 유화 물감을 만든다. (청금석은 중세 라틴어로 '천상의 돌'이란 뜻의 '라피스 라줄리 Lapis Lazuli)'로 금보다 비쌌던 푸른빛 울트라마린의 재료이다.)
그저 튜브에서 물감을 짜내는 모습만 보아왔던 내게 과학 실험실에서나 볼 수 있는 도구로 무게를 재고, 끓이고, 혼합하고 굳히는 일련의 과정은 화가의 행위라기보다는 마치 헛된 미몽에 사로잡힌 연금술사의 마법처럼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팩트다. 지금처럼 현대 과학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색과 안료를 만들기 이전에 인류는 인체에 치명적인 금속, 유독한 광물, 동물의 배설물, 벌레 등에 물리적 & 화학적 에너지를 가하여 컬러를 만들었다.
어느덧 내게 울트라 마린의 깊고 짙은 푸른빛은 동양의 이국적인 터번을 두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농염하고 묘한 시선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CHROMATOPIA
저자 : 데이비드 콜즈
원시시대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색 오커(ochres, 황토)부터 고대, 중세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물감 안료를 만드는 기술과 기술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과학적인 측면에서 잘 묘사한 이 책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역사 · 과학 · 디자인 마니아에게 아주 흥미로운 지적 유희를 던져줄 것 같다.
오리나 닭 같은 가금류의 다리 관절과 날개 뼈가 화이트 색상의 원료였다든가, 머미 브라운이라는 18~19세기 예술가들을 사로잡은 안료가 고대 이집트의 미라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역사상 가장 고귀한 왕실을 표현하는 자주색이 육식성 바다 우렁이에서 추출됐다는 색상의 고유한 계보는 컬러에 얽힌 이미지와 상징에 관한 감각적인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책 속에서는 형이하학적인 기술의 과학으로 형이상학적인 인문학의 관념을 지닌 색채가 시간을 초월하며 신비롭게 펼쳐진다.
"너는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해?"
"빨간색을 좋아한다니.... 음 너는 분명 이런 사람이겠구나!"
맙소사! 이게 무슨 시대착오적인 구태의연한 질문이냐고??? MBTI도 아니고. 물론 지탄받아 타당한 혈액형을 묻는 실수보다는 조금 낫다. 하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그리고 어울리는 컬러가 있다. 뷰티와 패션분야에서 색채학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퍼스널 마케팅에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의 열광을 하고 과감한 소비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컬러는 개개인의 심리와 성향을 담고 있기에 종종 우리는 컬러로 치유를 받고(마크 로스코의 색면화를 연상해 보자), 더 매력적인 캐릭터로 스스로의 이미지를 브랜딩해나간다. 아,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겠다.
"당신의 퍼스널 컬러는 무엇인가요?"
이 책 『예술가가 사랑한 컬러의 역사 (Chromatopia)』 는 일생을 색과 함께 보낸 현직 물감 제조업자인 데이비드 콜즈가 소개하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주요했던 안료 60여 개를 담고 있다. 각 컬러가 어떻게 탄생하여 각광받고 또 왜 쇠퇴하게 되었는지를 색의 아름다움과 깊이, 그리고 인문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지식으로 설명해 준다. 예술가들이 원할 컬러를 만드는 사람인 물감 제조업자, 이 누구보다 컬러와 가까운 사람이 고혹적인 컬러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책이다. 현재에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옛날 장엄한 중세의 필사본과 르네상스 예술 작품에 사용되었던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컬러의 숨겨진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게 된다.
19세기 인상파 화가 반고흐의 따뜻한 노란색이 지금은 왜 초록빛을 띠고 있는지 아는가?
고대의 색 COLOUR IN THE TIME OF THE ANCIENT
인류가 합성한 최초의 색
이집션 블루는 이집트의 대피라미드가 지어진 약 5천 년 전에 정확하고 치밀한 제조법으로 발명됐다. 석회, 구리, 이산화규소, 천연 탄산소다를 가열해 만들어졌으며 이집트 네페르티티 Nefertiti 여왕의 그 유명한 왕관이 이집션 블루의 색을 띠고 있다. 이집션 블루는 벽화, 조각상, 석관에 광범위하게 쓰였는데, 그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제국의 외관 지역까지 널리 사용됐고, 크노소스의 궁전과 폼페이, 로마 벽화에도 쓰였다. 고전 시대에는 폭넓게 쓰였지만 로마 제국이 몰락하면서 제조법도 사라졌다.
고전시대의 색 COLOUR+THE CLASSICAL WORLD
가장 위대하고도 잔혹한 흰색
약 2천 년 동안 꾸준히 생산된 리드 화이트는 납에 이산화탄소, 식초(아세트산) 증기를 반응시켜 만든 염기성 탄산납이다. 이 제조법은 19세기 들어서도 거의 달라진 점이 없었다. 강철의 회색 납을 부식시켜 눈송이 같은 완벽한 흰색으로 바꿔주는 이 마법 같은 연금술로 인해 리드 화이트는 플레이크 화이트(flake white)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은처럼 하얀 리드 화이트는 수백 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안료였다. 리드 화이트 없이 미술의 역사를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납은 독성이 강해 오래 노출되면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플랑드르 그림 80여 점에 리드 화이트(납백색)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색은 피카소와 같은 20세기 예술가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리심>(1611-13)은 플랑드르 화가들이 리드 화이트와 초크 화이트를 혼합하는 플라이밍 기술의 사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전시대 : 기원전 8세기 초 그리스 문명부터 서기 5세기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중세의 색 MEDIEVAL COLOURS
중세 필사본 채색가에게 가장 중요했던 노란색은 크로커스 꽃의 수술에서 추출됐다.
본래 페르시안 옐로로 알려진 사프란은 고대 수메르인이 향수나 약제로 사용했고, 고대 이집트인은 미라의 붕대를 염색하는데 썼고, 로마 황제는 목욕할 때 뿌리는 향수로 썼다. 고대부터 중국 황제의 가운을 염색하는 등 천의 염료로 쓰였고, 와인, 식품, 화장품의 색소로도 사용됐다. 또 사프란의 사랑의 색으로도 유명했다.
첸니노 첸니니(14세기 후반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이자 미술에 대한 이탈리아 최초의 논문인 '예술의 서'를 저술)는 사프란과 버디그리를 혼합하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풀색'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프란은 색이 바랜다. 우리가 지금 보는 중세 필사본의 파란 나무, 풀, 옷 등은 원래 모두 초록색이었다.
*버디그리 : 부식으로 형성되는 청록색 안료. 19세기까지 화가들에게 가장 생기 넘치는 초록이었다.
불가사의한 색 MISTERIOUS COLOURS
이름처럼 섬뜩한 안료
머미 브라운은 어두운 갈색 안료로 '머미아mummia' 또는 '카푸트 모르투움 caput mortuum (죽은 머리)'이라고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가 된 죽은 사람과 동물의 살, 뼈, 붕대로 만들었다. 1586년, 고대 이집트의 거대한 무덤을 방문한 영국 여행가 존 샌더슨은 자신이 한 행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시체를 부위별로 분리해.... 집에 온갖 머리와 손, 팔, 발을 가져왔다.'
머미 브라운은 16세기 미술에 처음 사용됐지만 18~19세기에 가장 인기가 많았다. 불투명한 진한 갈색의 머미 브라운은 유화에서 글리이징과 명암을 낼 때 사용됐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들라크루아가 미라를 갈아서 만든 색소를 사용했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머미 브라운으로 칠해졌다고 추정되는 작품이다. 머미 브라운은 19세기 영국 사실주의 경향의 라파엘 전파가 가장 좋아하는 색상 중 하나이기도 했다.
색의 폭발적 증가 THE EXPLOSION OF COLOURS
강하지만 금세 변색되는 안료
19세기 초,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선명하고 강한 황금색과 진한 주황색, 심지어 빨간색까지 만들 수 있는 크로뮴과 납을 합성한 크롬산납이 탄생했다. 1836년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해 반 고흐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에게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비교적 제조하기 쉽고 은폐력이 뛰어났던 크롬산납 안료는 내광성이 약하고 화학적으로 불안정했다. 크롬산납이 변색된 대표적인 예로 반 고흐의 노란색을 꼽을 수 있다. 따뜻한 노란색이 지금은 초록빛을 띠고 있다. 크롬산납은 80년 동안 사용되다 카드뮴으로 빠르게 대체됐고, 19세기말에는 예술가들의 파라레트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드디어 대기의 진짜 색을 찾았다. 바로 보라색이다.'
1881년, 클라우드 모네가 단호하게 던진 말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망가니즈 바이올렛을 숭배하다시피 해서 비평가들의 바이올렛 마니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1868년에 발견된 이래로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불투명한 자주색을 띠는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생산 비용도 저렴해서, 옅은 코발트 바이올렛을 신속히 대체했다. 비록 착색력이 그리 뛰어나진 않지만 광채가 나고 매혹적이다. 인상주의 예술가는 그림자가 검은색이 아니라 물체에 반사된 빛의 보색이라고 여겼는데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이에 걸맞은 완벽한 색이었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시리즈에서는 같은 대성당이라도 하루 동안 조명에 따라 인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색상을 활용했다. <루앙 대성당, 서쪽 파사드, 햇빛>(1894년)에서 모네는 에서 망가니즈 바이올렛으로 아침 햇살 속의 그림자를 표현했다.
"나는 저녁에 퇴근하고서 18세기에 쓰였던 방법대로 원료와 안료를 물에 끓여 녹이고 필터로 거르고 섞어서 수제 물감, 보조제. 바탕용 보조제를 만들었다. 하면 할수록 매혹적인 작업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원료로 아름다운 물감을 만드는, 색을 다루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