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 리뷰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픽사(PIXAR)의 야심작 ‘소울’이 곧 개봉할 것이라는 소식은 내게 가뭄 끝 단비와도 같았다. 3년 전 ‘코코’를 통해 죽은 자들의 세상을 실감나게 구현해낸 픽사 아닌가. 그런데 이번엔 태어나기 전의 세상이라니! 픽사가 또 한 번 일을 냈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영감과 재능에 얽힌 거대한 비밀이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안고 ‘소울’을 관람했다.
‘소울’의 주인공 ‘조’의 꿈은 이름난 재즈 연주자가 되는 것이다. 어릴 적 아빠를 따라 들른 클럽에서 우연히 재즈의 매력에 빠진 후, 재즈는 그에게 소명이 되었다. 오랜 기간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무대를 찾아 헤매던 조는, 곧 꿈에 그리던 클럽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음을 맞는다. 발을 헛디뎌 맨홀에 빠지고 만 것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저승길을 역행하다 태어나기 전 세상(영화에선 ‘유 세미나’로 부른다)으로 숨어든다.
그러나 유 세미나에 당도한 조가 ‘모험’을 시작하면서부터 영화에 대한 내 기대는 곧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소울’은 아기 영혼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방식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명백하게 어떤 존재들을 배제하고 있었다.
먼저 곧 태어날 영혼들이 지구를 향해 뛰어내리는 장면이 그랬다. 뮤지션으로 소명을 실현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은 것이 억울한 ‘조’는 이승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러 번 지구로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지구로부터 튕겨져 나온다. 이미 죽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 과정을 희화화한다. 뛰어내린 조가 지구에 의해 거부당할 때 조는 이 과정을 게임의 한 장면처럼 즐기는 듯 보이고, 배경으로는 우스꽝스러운 효과음이 깔린다.
이 장면은 조가 돌아가려고 하는 곳, 즉 다른 영혼들이 태어날 곳을 영화가 ‘안온하고 풍요로운’ 공간, 다시 말해 ‘미국’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혼들 중 일부는 분명히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로, 굶주림이 일상인 나라로, 통치자의 지배 아래 자유를 억압받는 나라로 가게 될 텐데도, 영화는 그런 세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배제한다.(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누군가는 생의 무게를 짊어지느라 이 순간에도 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울’은 곧 태어날 영혼들이 도착하게 될 곳에 그런 세계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애써 지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소울’이 만든 세계에서 지구는 미국, 그중에서도 꿈을 좇을 여유가 있는 일부 사람들의 공간으로 축소된다.
이런 장면이 더욱 아팠던 것은 영화가 미국 외의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맨 처음 조가 죽어서 저승으로 향하는 다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각국의 죽은 영혼들이 모여 있었다. 각지에서 온 영혼들은 영어가 아닌 제2, 제3의 언어로 대화했고, 그중엔 한국어를 쓰는 영혼도 있었다. 이는 영화가 다양한 나라,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지 않는다는 명확한 증거다. 하지만 ‘소울’은 저승길에 전 세계의 영혼을 불러 모은 뒤 유 세미나에선 그들을 차갑게 외면한다.(픽사는 ‘다양성 존중’을 새 기치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장면을 넣는다고 해서 다양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곧 태어날 영혼들이 성격을 부여받는 장면 역시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었다. ‘제리(카운슬러)’들은 유 세미나에 흥분의 집, 불안의 집 등을 지어놓고, 그곳에 아기 영혼들을 무작위로 들여보낸다. 흥분의 집을 통과한 영혼은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 되고, 불안의 집을 통과한 영혼은 작은 일에도 불안해하는 사람이 되는 식이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듯, 인간의 성격은 결코 특정 인자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느긋한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조차 불안정한 환경에 오랜 기간 노출되면 불안증을 앓기 쉽다.
마찬가지로 쉽게 냉정을 잃고 흥분하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것이 순전히 그의 ‘생득’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거친 성장 환경에 내몰려 트라우마를 앓는 사람에게, ‘네 성격은 모두 네가 가진 인자에서 비롯된 것이니 받아들여라’고 말한다면 그보다 더한 폭력이 어디 있을까?
일방적 묘사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무렵, 영화는 갑자기 ‘부여된 성격’의 혐의를 ‘부여받은 자’에게 씌우는 듯한 태도마저 취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전제에 맞게 성격을 ‘부여받았을’ 뿐인 어린아이를 ‘심각한 문제아’라고 규정할 때는 ‘소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의구심마저 일었다.
3년 전이 떠올랐다.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낸 나는 그에 대한 추억을 안고 ‘코코’를 관람했다. 이승에 남은 사람이 기억하기만 한다면 죽은 이들도 저승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남겨진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고마운 이야기의 이면에도 배제된 영혼들은 있었다. 가족이 없는 이들, 기억해 줄 사람이 없는 이들이었다.
픽사의 ‘가족 중심적’ 세계관에서 가족이 없는 이들은 저승에서조차 가난하고 힘들게 살다가, 결국엔 잊혀 소멸되고 마는 존재다. 그들의 세상에서 어떤 생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조차 배제당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모든 이들을 대변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모든 이를 대변할 순 없지만 누군가를 배제하고 시작해선 안 된다’고.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윤리라 믿는다고.
영화의 종반부, 태어나기를 줄곧 거부해온 영혼 ‘22’는 마침내 관심사를 찾아 지구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22’가 ‘어디로’ 날아가게 될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다. 픽사의 선택을 받은 그는 필시 미국, 그중에서도 살기 좋은 땅으로 날아들 것이다.
나 역시 비교적 운이 좋아 생의 절반을 꿈을 좇으며 살 수 있었다. 이렇게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그 감상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도 내가 좋은 환경에 태어났음을 방증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소울’이 외면한 영혼들을 변호하고 싶었다. 꿈을 꿀 수 있다면, 꿈을 꿀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나는 그것이 무작위 추첨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