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가디슈'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2015년작 ‘베테랑’을 극장에서 세 번 봤다. 혼자 한 번, 언니와 한 번, 식구 모두와 또 한 번. 액션영화 마니아인 아빠와 극장에 자주 가지 않는 엄마,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언니와 나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영화였다. 배꼽이 빠지게 웃겼고, 웃음 못지않게 묵직한 한 방이 있었다. 감독 류승완은 비현실적인 상황과 캐릭터들을 운용해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줄 아는, 진짜 베테랑 같았다. 6년이 지난 지금 ‘베테랑’을 다시 관람한다면 어떨까, 그때와 같은 마음일까? ‘모가디슈’를 보고 나오는 길에 새삼 궁금해졌다.
‘모가디슈’는 1991년 소말리아 수도인 모가디슈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당시 우리나라는 UN에 가입하기 전이었고, 가입을 하려면 아프리카 국가의 지지가 필요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소말리아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모가디슈에 대사를 파견한다. ‘한신성’(김윤석) 대사는 소말리아 대통령이었던 ‘바레’의 지지를 얻으려 분투한다. 북한 역시 바레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공세를 펼치고, 남과 북은 소말리아에서도 서로를 견제하고 또 경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가디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22년간 독재를 해온 바레 정부를 향해 반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모가디슈에 고립된 한신성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귀국할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대사관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급기야는 통신마저 끊겨 구조 요청도 할 수 없는 상황. 며칠이 지난 밤, 북한 대사관 일행들이 대한민국 대사관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북한 대사관은 이미 공격받아 더는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남과 북은 머리를 맞대고 탈출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한 대사는 대한민국과 수교를 맺은 이탈리아 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이탈리아 대사관은 (자신들과 수교를 맺지 않은) 북한사람들의 탑승을 불허하고, 한 대사는 그들이 곧 대한민국으로 전향할 것이라 둘러댄다. 그리고 끝내 모두 함께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토대가 된 것은 모가디슈에 파견됐던 실존 인물 강신성이 당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물론 극적으로 각색한 부분도 있다. 영화에서와 달리 남과 북은 그렇게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대진’(조인성) 참사관 역시 가공인물이다.) 남북의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이기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여지는 어쩌면 더 클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몇 가지 윤리적 문제가 있었다.
한낱 배경이 돼 버린 소말리아의 비극
남북이 협력해 탈출에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화합만이 살 길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화합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숱한 사람들이 죽고 다친 소말리아 내전을ㅡ소말리아는 현재도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다ㅡ도구화해도 될까? 인물들이 힘을 합쳐 소말리아를 빠져나오는 과정을 영화가 실감나게 묘사할 때, 소말리아와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그저 ‘기피해야 할 악’으로 다뤄진다. 그러나 영화가 ‘당장이라도 빠져나가야 할 지옥과도 같은 곳’으로 묘사하는 그곳은 소말리아인들의 ‘삶의 터전’이다. 영화가 모든 전후 사정을 생략하고 주인공들의 탈출에만 집중할 때 정부군과 반군은 ‘단일한 악’이 되며, 내전의 원인이 무엇인지, 소말리아 사람들이 그간 어떤 어려움을 딛고 살아왔는지 등의 이야기는 모두 휘발되고 만다.
영화가 사건을 촉발시키는 방식 역시 아쉽다. ‘모가디슈’는 한 대사의 운전기사였던 소말리아인 ‘소마’가 목숨을 잃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곧 영화가 사건을 진행시키기 위해 인물을 일부러 죽였다는 뜻이다. 전쟁의 도구였던 소년병이 영화에서마저 내전의 시작을 알리는 도구가 된 셈이다. 많은 상업 영화들이 이런 기능적인 접근을 시도하지만,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라면 달랐어야 하지 않을까.
소년병의 ‘평면적 악마화’
대한민국 대사관에 찾아온 북한 대사관 일행은 자신들이 비무장 상태임을 강조하며 피신을 도와달라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남한 측 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은 훈련을 받아서 맨손으로도 사람을 죽인다더라” “어린 애들도 군사교육을 받는다더라”며 그들을 불신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이 한 공간에서 숨죽이고 있는 내내 남측 사람들이 북한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영화의 이런 태도는 소말리아 아이들 앞에선 돌변한다. 영화는 소말리아 소년병이 자기 키만 한 총을 들고 웃는 모습을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오랜 시간 보여주고, 두려운 듯 벌벌 떠는 북한 성인들의 모습도 이어서 담는다. 이 장면에서 소말리아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전쟁에 동원돼야 했던 가련한 소년병이 아니라 차라리 악마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영화를 보며 자꾸만 지금의 우리나라와 소말리아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역시 불편함을 증폭시켰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된 우리나라와 지금도 여전히 가난으로 고통받는 소말리아의 사정을 고려할 때, 영화 속 상황이 기만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어떤 재현은 폭력일 수 있다
영화의 종반부에는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하는 남과 북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인물들은 자동차를 타고 총탄이 날아오는 전장을 통과하는데, 이때 죽은 사람들의 몸을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분명 이 장면 역시 강 대사의 증언을 토대로 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겪은 일이라 해도 그것을 재현할 때는 윤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아마도 당시 인물들은 자신들의 생존이 너무도 절박한 나머지 시체를 밟고 가면서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기도 했고, 거리는 그야말로 죽은 몸들로 가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영화는 차에 타고 있는 인물의 입장에서 이 장면을 한 번 보여준다. 시체를 피해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던 운전자의 모습과, 어쩔 수 없이 시체를 밟았을 때 동요하던 동승자의 표정을. 문제는 카메라가 차들의 뒤편에 서서 자동차가 시체를 밟고 넘어가는 장면을 담아낸 데 있었다. 이것은 사건을 경험한 인물들의 시선이 아니라 명백하게 ‘영화의 시선’이어서, 나는 이 장면이 몹시도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한 대사 일행을 공격했다가 목숨을 잃은 반군의 몸 옆을, 한 대사가 분풀이를 하듯 비켜 가는 장면에서는 그가 아니라 영화가 차를 몰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감독은 모가디슈에서 사투를 벌인 것이 ‘영화’가 아니라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걸까.
류승완 감독은 자타공인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관객들이 재미있어 할 부분이 어디인지, 완급 조절이 필요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그는 정확하게 안다. 류 감독의 차기작이 매번 기대되는 이유다. 그러나 실화를 극으로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엔터테인먼트이기보다 윤리가 아닐까.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소말리아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