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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Nov 10. 2021

미래 이전에 현재를 보았더라면

영화 '듄'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팬으로서 나는 드니 빌뇌브가 구축한 세계에 열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영화들엔 분명 어떤 공통적인 색채가 있었지만, 그것이 더 큰 세계로 확장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를 단순히 장르 영화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던 것이, 오락적 기능이 도드라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뚜렷한 미학이 드러나지 않는 것에 비해 다소 과대평가된 감독이 드니 빌뇌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의 그런 생각을 완벽하게 깨부순 영화가 있었으니, ‘컨택트’였다. 동시대 SF소설의 대가 테드 창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를 평가할 수 있다면, 그 평가는 ‘영화가 이야기를 형상화한 방식’에 한정돼야 할 것이다.(테드 창의 소설은 이미 그 자체로 완결적이고, 드니 빌뇌브가 이 소설의 영화화를 결정한 이유도 여기 있을 테니.) 그러나 독자가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이미 하나의 세계를 그리는 이상, 그 상상을 완전히 폐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관객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독자의 머릿속에 이미 자리 잡은 이미지를 감독 자신이 새롭게 구축한 이미지로 완벽하게 압도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컨택트’는 인상적인 영화였다. 어쩌면 SF야말로 드니 빌뇌브의 진짜 재능을 드러내기에 알맞은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듄’이 기대됐던 것은 그래서다. 드니 빌뇌브와 미국 SF소설의 거장 프랭크 허버트의 기념비적 고전의 만남. 그러나 ‘듄’을 관람한 지금은 드니 빌뇌브가 영화화할 작품으로 왜 이 소설을 선택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거대한 스케일과 현대적인 이미지 등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했지만, 그게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그가 관객에게 들려주고자 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어떻게(스타일) 그릴지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무엇을(문제의식) 그릴지는 고민하지 않았다고 할까.


 ‘듄’은 서기 10191년, 황제가 다스리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다. 우주에서 가장 신성한 물질로 꼽히는 스파이스-지금의 석유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와, 스파이스의 생산지인 아라키스 행성을 지배하기 위해 대가문 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지금까지 스파이스는 하코넨 가문이 도맡아 생산해왔는데, 어느 날 아트레이데스 가문에 황제의 서신이 도착한다. 하코넨의 뒤를 이어 아라키스를 지배하고 스파이스를 채굴하라는 것이다. 명을 들은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삭 분)은 군대를 이끌고 아라키스로 향한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건 황제와 하코넨 남작이 꾸며낸 계략이었다. 레토 공작은 하코넨의 기습 공격으로 죽음을 맞고, 그의 아내 제시카(레베카 퍼거슨 분)와 아들 폴(티모시 샬라메 분)은 추격을 당하지만 초능력을 가진 덕분에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둘은 이후 아라키스 행성의 원주민인 프레멘 무리에 합류한다.


 대략적인 줄거리만 놓고 본다면 인류는 8000년을 지속해, 엄청난 기술력과 초능력까지 가졌음에도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변함없이 약자와 자연을 착취한다는 메시지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영화는 지금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더하여 영화가 여러 편의 연작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한 편 한 편이 완결성을 가져야 하는데, ‘듄’은 거기엔 관심이 없는 듯하다.(이 영화가 결국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하게 한 것은 명백하게 감독의 실수다.) 온라인상에는 ‘듄의 세계관’을 알고 가야 이 영화를 제대로 관람할 수 있다는 말이 퍼져 있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그만큼 기본적인 정보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원작을 읽은 사람에게만 유효한 영화라니….


 2022년, 우리는 당장 몇십 년 뒤를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유례없는 팬데믹과 기후위기는 인류의 존폐를 위협하고 있다. 당장 2100년만 돼도 인류와 지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8000년 남짓 지난 10191년에 인류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게으른 가정이라니, 너무 손쉽고 안일한 태도 아닌가?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이 나온 것이 1960년대이고, 그는 기후위기 이전인 1980년대에 이미 사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드니 빌뇌브는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 전에 진지하게 되새겨보았어야 했다. 그 60년 사이에 인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1965년(‘듄’ 1권이 출간된 해)에 프랭크 허버트가 상상한 우주는 이제 없다. 당연하게도, 1965년에 상상했던 방식으로 2021년에 10191년을 상상할 수는 없다.


 더욱 기만적이라고 느꼈던 것은, 영화에 등장한 시대착오적 설정들이다. 드니 빌뇌브가 상상한 인류는 10191년에도 남성 중심적 사고를 한다. 제시카와 제시카의 시종들은 몸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드레스를, 베게 게세리트 세력은 부르카를 연상시키는 옷을 입는다.(신체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채 지금도 고통받는 여성들이 있는데 이런 설정이라니, 당황스럽다.) 남작이 독가스를 마시고 치료받는 동안 그의 옆을 지키는 시종은 모두 ‘여자아이들’이다. 감독의 상상 속에선 10191년에도 ‘첩’이 존재하는데, 폴을 낳아준 제시카는 레토 공작의 ‘첩’이다.


 동양에 대한 대상화 역시 문제적이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행성과 거주지는 과거 중국의 문화유산과 건축양식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며, 배우들이 입고 있는 옷은 동양 전통 의상을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레토 공작이 초반부에 입고 나온 옷은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심지어 영화에 나오는 악기의 형태와 소리마저 동양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동양은 ‘실재하는’ 세계다. 이미 지구 반대편에 그 세계에 발 딛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가져다 낯선 미래의 것으로 포장해 쓰다니. 이것이 대상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듄’은 최첨단 기술을 손에 쥐고도 1965년에 갇혀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 아니, 현실조차 보지 못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인류가 아주 먼 미래에도 경쟁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서로를 공격하고, 힘없는 민족과 자연을 착취한다는 데 주제의식이 있지 않겠냐고. 그러나 그런 이야기라면 이미 숱하게 들어왔고, 지금도 듣고 있다. 8000년 후 미래까지 가서 그 이야기를, 그것도 전혀 새롭지 않은 방식으로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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