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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Jul 01. 2022

누가 섣부른 희망을 말하는가

영화 '브로커'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 ‘어느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이 영화 속 인물들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한 가족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유사 가족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경제력이 없다는 것이다. 빠듯한 살림 탓에 이들은 부족한 것을 ‘훔쳐서’ 메우기 일쑤다. 노동의 기회마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게 아닌 지금의 사회구조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절도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영화의 문제는 절도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오사무(아빠)의 도둑질에 끊임없이 아이들이 ‘동원’된다는 사실이다. 오사무와 노부요(엄마)는 친부모에게 학대당하던 유리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자신들의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선의로 결정한 일이지만 이 역시 유괴나 다름없다.


 물론 영화가 모든 순간 도덕적 올바름을 기준으로 설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부적절한 설정이 사회의 부조리한 부분을 가리키기보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을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하게 만드는 데에 그친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가족’에서 아슬아슬했던 수위는 ‘브로커’에서 완전히 선을 넘은 것처럼 느껴진다.


 비 내리는 저녁, 소영(아이유 분)이 아기를 안고 성당 앞에 마련된 베이비박스로 향한다. 버려진 아기 우성은 곧바로 인신매매범 상현(송강호 분)과 동수(강동원 분)의 타깃이 된다. 경찰 수진(배두나 분)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잠복 중이다. 다음날, 소영의 마음이 바뀐 걸까. 성당을 다시 찾아가 보지만 우성은 이미 그곳에 없다. 소영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상현과 동수는 소영에게 사실대로 털어놓는다. 자신들은 공식 입양이 어려운 가정에 아이들을 보내 그들에게 새 삶을 찾아주고 있으며, 그 대가로 소정의 사례금을 받는다고.


 소영은 성매매 여성이고, 사고로 임신했다. 아이를 지우라 강요하는 우성의 친부와 실랑이하다 그를 살해했다. 소영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우성을 키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그는 상현, 동수와 함께 우성의 새 부모를 찾는 여정에 동참하기로 한다.


 “낳고 나서 버리는 것보다, 낳기 전에 죽이는 게 죄가 더 가벼워?” 경찰 수진이 소영에게 ‘책임지지 못할 아이를 왜 낳은 것이냐’고 다그치자 소영이 이렇게 맞받는다. 이 대사가 문제적으로 들리는 것은 단지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무책임한 부모가 낳은 ‘피해자’다. 꼭 데리러 온다는 친모의 말을 믿고 입양 가기를 거부했던 동수,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길거리를 전전해야 했던 소영, 자신을 입양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여덟 살 해진, 그리고 태어나기도 전부터 친부에게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으로 모자라 친부를 살해한 친모를 둔 우성까지. 어떤 존재는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진 삶을 감당해야만 한다. 이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태어나줘서 고맙다’니?


 감독은 이 대사를 통해 이들의 문제를 관찰자의 시선으로만 보고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들켜버리고 만다.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진’ 것을 내내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이런 위로라니, 일방적이다 못해 폭력적이지 않은가? 고레에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이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감독은 ‘브로커’라는 영화를 통해 이들이 처한 문제적 상황을 ‘사랑으로 연대한다면’ 충분히 극복 가능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마음 따뜻한 사람들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 주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애초에 소영이와 동수가 영화에 등장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에 있어서도 감독의 고민은 깊지 않아 보인다. 단적인 예로 동수가 어떤 이유에서 상현과 함께 아동 인신매매 브로커로 일하는지를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알기 어렵다. (의아하게도) 선한 인물로 묘사된 그를 보고 있자면, 언뜻 기회가 없는 아이들에게 입양길을 열어주고 싶어 이런 행동을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무례한 ‘구매자’들에게 쓴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게이 커플에게 아이를 입양시켰다며 신이 나 말하는 대목을 보면 이 인물이 정말 아이들을 위해 이러는 게 맞나 싶어진다.(게이 부부가 좋은 보호자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동성 간의 결혼이 아직 합법이 아닌 사회에서 게이 부부의 자녀로 자라날 아이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조금도 없다는 것이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그런 일방적 결정을 그저 선한 일로 묘사해 버리는 것 역시.)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으로 보이는 캐릭터는 어쩌면 수진이 아닐까. 그는 브로커 일당을 체포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책임질 수 없다면 아이를 지우는 게 맞다’고 말하며 내내 이성적으로 판단해오던 그가 대뜸 베이비박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할 때(‘베이비박스가 있기에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는다’)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문제는 베이비박스의 유무가 아니다. 영화는 이미 동수의 말을 통해 알고 있다. 15세 여아와 파키스탄 여성에게는 아이를 낳지 않을 선택권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베이비박스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최소한의 보호장치다. 일관성 없이 마구잡이로 그려진 캐릭터(수진)는 급기야 ‘아이를 가장 팔고 싶어 했던 건 자신이었던 것 같다’며, 브로커 일당을 이해하고 옹호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문제들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것은 영화에 삽입된 배경음악이다. 브로커 일당이 아이를 팔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때 그들 뒤로 깔리는 음악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따뜻하다. 음악은 잊을 만하면 등장해 관객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들의 여정을 유쾌하고 즐거운 것으로 느끼라’고. 그러면서 관객의 판단 영역을 좁혀버린다.


 ‘브로커’의 아쉬운 지점들이 (감독과 배우의) 언어의 다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해도 옳고 그름의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번 영화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품지 말아야 할 것까지 품어 안고 말았다.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름 앞에 붙은 지 이미 오래다. 관객 입장에선 그만큼 더욱 엄격해진 잣대로 그의 영화를 볼 수밖에 없다. 고레에다 감독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영화가 세상에 존재하는 ‘소영’들에게 정말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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