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일요일 밤

(43일째) 금주(禁酒) 일기

by 하늬바람


나의 금주(禁酒) 일기 - 43일째


- 별이 빛나는 일요일 밤 -


(opening).


저번 편 나의 금주(禁酒) 일기 40일째는 ‘비의 향기’ 였습니다.

우리가 꽃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게 그 꽃의 빛깔과 향기라는 속성 때문입니다.
꽃처럼 사람도 그만이 가진 고유의 속성이 있습니다. 꽃도 사람도 향이 진하면, 비에 젖더라도 오래갑니다.그리고 그 향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더 진해지기 때문입니다.
(opening 끝)


오늘은 여기부터입니다.


일요일이 다가는 시간입니다. 비가 와서 밖에도 못 나가고 책 좀 읽다가 글을 쓰기 시작한 김에 금주 일기도 쓰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이발하러 집 앞 미용실에 다녀왔습니다. 미용실 사장님이 이발이 끝나고 나서 한 말씀 하십니다.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이발하는 내내 자고 있었거든요.

요즘 금연, 금주로 인한 금단현상인지 밥만 먹으면 졸립니다. 그것도 심하게 잠이 옵니다.

알코올과 니코틴에 의해 유지해 오던 뇌활동의 영향일까 싶기도 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발하는 내내 고개를 못 들고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발하시는데 불편하지 않았을까 굉장히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금연인지, 금주영향인지 머리카락도 더 잘 자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내 맘속 생각도 자라납니다.

잠을 자는 동안 꿈속에서도 끊임없이 자라납니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온갖 욕망,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 현실에 대한 불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지난 추억, 꿈에 부푼 기대. 등등 끝도 없이 자라나는 생각의 머리카락은 정신없이 무성해집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차분해지기도 합니다.

차분해진다는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것 같지만 그냥은 되지 않고 미용실에서 커트를 하거나 머리를 다듬고 나서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같은 거 아닐까 싶습니다.

잘 다듬어진 생각은 나를 차분하게 하기도 하지만, 남보기에도 좋습니다. 그러면서 더 멋있어지고, 성숙해지는 거라 생각됩니다.

금주를 하는 것도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듬듯이 나의 몸과 마음가짐을 한 번씩 조절해 가는 과정일 겁니다.


미용실에서 커트를 다하고 나서 돌아 나오는데, 미용실 사장님이 한 말씀하십니다.


‘머리 자연스럽게 잘됐네.’


그 말이 힘이 됩니다.

내 맘속 생각들도 푹 자고 났더니 더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시는 이걸로 골라 보았습니다.

70,80년대 미장원 느낌이 정겨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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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매 미장원에서

- 조연희


유난히 머리가 빨리 자라던 그해 여름

간판도 없는 미장원에 간다.

예약도 없이 간다.


마루에서는 덜걱 덜컥 꽃들이 피고

봉충다리 의자에선 햇빛이 삐거덕거리며 졸고

거울도 없는 미장원에 간다.


당신은 늘 그렇게 ‘야매’로 왔으므로

무면허 미용사는 이빨 빠진 가위로

내 덧없는 그리움의 길이를 가늠해 본다.


근심처럼 손톱과 발톱이 자라고

더러 잘못 자른 머리로

목덜미가 더 길어지기도 했다.


오늘도 나팔꽃 씨방 같은 미장원에 간다.

파마약 냄새가 나팔꽃넝쿨처럼

내 머리 위에서 구불거리고

골방에선 서둘러 까만 씨앗이 되는 꽃들.


당신은 속성으로 저무는 새벽노을이다.

--끝--


속성으로 저무는 새벽노을 이란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그리움의 길이가 그러한가 봅니다.


글 분위기에 맞는 그림도 한편 골라보았습니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빗질하는 소녀" 입니다.

전체적으로 같은 톤과 색감을 사용하면서 빛이 어떻게 사물을 보이게 하는가를 알려주는 부드럽고 은은한 느낌의 그림입니다.

소녀의 마음 속 머리결같은 그리움의 길이도 정리되고 있는중이겠지요.

인상주의 화가들은 고정불변의 색을 해체하고 빛에 의한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빛이 없는 어두운 밤에도 고흐는 별에 의한 빛만으로 역동적인 ‘별이 빛나는 밤’ 을 그려냈습니다.


금주 43일째입니다. 며칠간 계속된 비구름이 사라지고 머리도 마음도 별도 구름도 모두 차분하게 빛나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