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89일째) 속초바다와 기다림

by 하늬바람

(opening)


저번 편 88일째는 ‘강원도에 핀 꽃과 술 한잔 - 화무십일홍 금주백일’ 이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계절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봄은 화사한 파스텔화,
여름은 물기 가득한 수채화,
가을은 알록달록 유채화..
그리고 겨울은 수묵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은 유채화의 계절입니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을 이렇게 바꿔봅니다.
‘화무십일홍 금주백일’
꽃은 열흘을 못 피고, 금주는 백일은 간다.

(opening 끝)


오늘은 여기부터입니다.

슬기로운 금주(禁酒) 생활 89일째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속초바다와 기다림



어제 강원도 속초 2일째는 일과를 끝내고 혼자서 가볍게 시내구경을 나갔습니다.

혼자인 이유는 술자리를 피했기 때문입니다.

양미리 축제를 하는데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입니다. 겨울 동해바다의 양대 진미라고 양미리하고 도루묵 생선구이가 한창입니다.

차가운 동해바람을 등뒤로 숯불이나 연탈불에 석쇠를 얹어서 구워 먹는 모습에 한 접시 하고 싶긴 한데 소주 없이 먹기도 힘들거니와 혼자서 시킬만한 게 아닌 거 같아 곁눈길만 주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속초항과 동명항 근처 바닷가에서 바닷바람과 짭조름한 바다 내음을 느끼며 야경을 즐겨봅니다.

바다를 보면 이유 모를 쓸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동해의 깊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속에 담긴 고독과 기다림이 떠오릅니다.


어릴 적 어머니를 기다리던 마음,

학교 다니며 방학을 기다리고,

다시 방학이 끝나면 친구들을 기다리던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느꼈던 설렘과 기다림,

강원도 군 생활 중 전역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간,

그리고 일을 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까지 삶은 늘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기다림은 마음을 소모하는 일인 듯하지만, 그 속에서 마음이 자라고 채워지고 조금 더 깊어지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모든 기다림은 ‘마음쓰임’ 이기도 하지만 ‘마음채움’ 이기도 합니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이 문장만으로도 가슴이 떨립니다.

책상 위에 꽃을 하나 꽂아두어도 잘 있는지 궁금하고, 자전거 타고 가며 만나는 나뭇잎 사이 햇살과 그 길도 기다려집니다.

누구나 누군가에게는 가슴 떨리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남들은 몰라도 나만 아는 그 소중함. 그게 기다림의 시작일 겁니다.

아무리 상처가 많고 모난 사람 같아도 그 사람 안아줄 그런 사람 만나면 솜사탕처럼 포근하게 녹아내립니다.

내가 그 기다림의 주체이든, 대상이든..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압니다.


그런 느낌 충만한 시를 동해바다 위로 띄워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 생략..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끝..


동해바다를 뒤로하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독립서점이 있기에 찾아갔습니다.

조금은 늦은 시간이지만 아직 문 닫을 시간은 아닌 것 같아 조금 기대를 했습니다.

기다리는 마음은 여기서도 일어납니다.

속초 골목길을 돌아 조금은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아담한 서점입니다.

안타깝게 오늘 문은 닫혀 있습니다. 안을 빼꼼히 내다보니 카페도 같이 운영하는 모양입니다.

속초 떠나기 전 시간되면 차 한잔 하러 들러야겠습니다.

유리문에 붙어있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 동네 책방 가는길’ 이라는 문장이 제 발걸음을 여기까지 오게했나봅니다.


그리고 빵집 명소가 있다고 해서 가보려 했는데 이내 포기했습니다. 속초시내가 휴가철이 아니면 전반적으로 빨리 문을 닫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요즘 빵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니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퍽퍽한 밀가루덩어리 취급을 했는데 요즘엔 그 안에 부드러움과 어떤 맛이 있다는 걸 조금은 알았다랄까요. 이것도 새로운 기다림인 걸까요. 아니면 술을 안 마시고 금주한 탓에 새로운 걸 알게 된 걸까요.


그리고, 별거 아니지안 금주 백일이 기다려지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