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째) 그 시절에 보내는 편지
(opening )
저번 편 슬기로운 금주(禁酒) 생활 89일째는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속초바다와 기다림’ 이었습니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생각해 보면 기다림은 마음을 소모하는 일인 듯하지만, 그 속에서 마음이 자라고 채워지고 조금 더 깊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모든 기다림은 ‘마음쓰임’ 이기도 하지만 ‘마음채움’ 이기도 합니다.
- 강원도 속초 영랑호수
(opening 끝)
오늘은 여기부터입니다.
슬기로운 금주(禁酒) 생활 90일째
- 그 시절에 보내는 편지
아주 오래전 별똥별이 가는비처럼 하나둘씩 떨어지는 늦가을 밤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습니다. 별이 떨어지기 전에 입밖에 나온 말이 끝나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늘 별이 먼저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소원을 생각할 시간도 없고, 다음번에는 생각했는데 입밖에 나오질 못하고, 또 그다음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별이 먼저 떨어집니다.
어어.. 이러다 별은 떨어지고 입안에 맴돌던 말들은 희미해져 가는 별빛처럼 몸속에 남아 깜빡깜빡거립니다.
별이 떨어지는 속도는 나의 소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밤하늘을 가로질러 저산 너머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별똥별의 꼬리는 긴 사선을 그리며 별의 그림자처럼 그리움을 남깁니다. 입 밖으로 나오다 만 말의 흔적들은 그 그림자에 끌려가 우주의 공간에서 메아리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강원도 화천에서 군생활하던 시절 야밤에 경계근무를 할 때 이야기입니다. 통상 보초를 선다고 말합니다.
지금 강원도에 와 있으니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신병교육을 강원도 춘성에서 받고 자대배치는 화천이었습니다. 입대했을 때 머리카락을 덜 자르거나 긴 사람들은 강제로 바리깡을 이용해 스님처럼 빡빡 밀어버렸습니다.
저도 입대하기 전날까지 계속 술 마시러 다니다가 바로 전날에서야 미용실에서 대충 스포츠머리로 자르는 바람에 군인용 머리카락 길이 기준보다는 길었나 봅니다.
그래서 빡빡 중대머리가 돼버린 제 머리통 때문에 별명이 스님이었습니다. 지나가던 선임들이 제 머리통을 보며 불만 있는 놈들이 꼭 빡빡 밀고 들어온다고 한소리씩 하며 지나갑니다.
신병교육이 끝나고 자대배치받았을 때는 별명이 가방끈이었습니다. 공부도 안 하고 졸업도 안 하고 대학을 4학년까지 다니고 오는 바람에 사회짬밥이 가장 길었기 때문입니다. 군대짬밥은 가장 작은 제가 ROTC로 임관한 소대장과 사회짬밥 나이가 같았습니다.
주변에 인가는 물론 불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원도 산골의 밤하늘은 칠흑 같았고 별들만이 빛을 담은 유일한 존재로 저의 빡빡 머리 위에 떠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김상현
꽃은 피어서 그 아름다운 맵시를
사람들의 눈에 심어 준 후 땅에 지고
별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을
아이처럼 꿈꾸게 한다.
가슴속에 한 그루 나무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사랑은 한없이 기다리는 것이며
기다려도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다가서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있다.
다가서면 다가선 만큼 멀어지는
도무지 잡을 수 없는 무지개
당신이 그런 사람이다.
내 눈에 당신이 꽃으로 피어 있듯
나는 당신의 마음을 밝히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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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별똥별이 떠올라 이 시(時)가 연상됩니다.
옮기고 보니 마치 어제 올린 시의 한 문장인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의 연작시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 이 시를 읽으며 능소화를 그려보았습니다.
지금 제 브런치 프로필이 된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때 꽃들이 살짝 비에 젖어있었습니다.
(처음 대충 밑그림 스케치. . 아이패드)
이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꽃은 땅에 있고, 별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꽃은 현실이자 현재의 것이고,
닿을 수 없는 별은 이상(理想)이자 꿈입니다.
시에 나오는 사랑의 대상은 사람인 경우도 있으나 자신의 이상과 꿈을 의인화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나무와 무지개도, 꽃과 별처럼 대칭을 이루면서 현실과 이상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 : 꽃 채색. . )
마지막 대목에선 당신은 꽃으로 피어있으니 현실 속 내 맘에 맺힌 것일 테고,
나는 그대의 별이 되고 싶다 하니 이상으로 남고 싶다는 뜻일까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만 보는 별 같은 존재로 만족한다는 걸까요.
내 주변의 좋은이들 그리고 좋은 생각과 하고 싶은 일들 모두 내 맘속에 키우고 있는 꽃이자 나무입니다.
능소화 나무처럼 내 맘에도 꽃을 잘 품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 번째 : 배경까지 . .)
군대에서 겨울 들어가기 전, 그리고 겨울 끝나고 나서 내무반 모포(군용 담요)를 한꺼번에 덤프에 싣고 세탁을 나갑니다. 보급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제가 병사 몇 명을 인솔하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지명의 장소에 대형 기계세탁을 하러 갑니다.
세탁이 끝나고 운동장 같은 넓은 장소에 줄지어 있는 빨랫줄에 다 널어놓으면 영화 속 염색천들이 나풀거리는 화려한 장면이 아닌 칙칙한 국방색(카키색)이 물기를 머금은 채 축 처져 늘어서 있는 늦가을의 쓸쓸한 느낌이 자연스레 연출됩니다.
모포가 마를 때까지는 우리는 더덕을 캐러 산을 돌아다닙니다. 강원도 북쪽은 지뢰매설 주의 표지판 있는 곳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일수록 사람손이 닿지 않아 오래되고 큰 더덕이 많습니다. 거기 들어가서 캐왔다는 김상병의 무용담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수 없지만 손바닥만 한 굵은 더덕을 들고 와서 자랑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색 바랜 담배간판이 지붕 아래서 찬바람에 덜거덕 거리는 집을 찾아갑니다. 무허가가 분명한 강원도 산골 동네 구멍가게입니다.
가정집 앞에 샷시를 설치해 공간을 만들고 허름한 좌대와 걸상이 있는 곳에 앉아 새우탕 컵라면에다 소주를 한잔씩 걸칩니다.
소주 한 병을 유리컵 글라스에 가득 따르면 딱 두 잔이 나옵니다. 못 마시는 사람은 한잔, 잘하는 사람은 두 잔으로 몸을 데우고 모포를 걷어 차에 싣고 뉘엿뉘엿해지는 산골을 등뒤로 부대로 복귀합니다.
입에 술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채 부대에 복귀해 내무반에 들어가려는 순간 소대장과 마주쳤습니다. 앞에 이야기했던 그 ROTC 출신 장교였습니다.
그 이후는. . . 상상에 맞기겠습니다.
그 시절이 어제 만났던 설악산 계곡물처럼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와있습니다.
그 구멍가게는 어디였을지,
더덕을 캐던 그 산은 어디였는지,
그곳에 다시 가서 컵라면에 소주를 마시면
그 어둑해져 가던 노을과 저녁하늘이 알콜처럼 내 혈관을 타고 흘러갈까요.
별똥별은 지금도 떨어지고 있을까요?
금주생활 90일째도 무사히 추억을 소주삼아 삼키며 동해안 해돋이를 바라봅니다. 강원도의 4일간 생활을 정리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