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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늑한 서재 Dec 06. 2021

06. 역 앞 야채가게

-프로의 세계를 엿보는 건 즐겁다.  

                                                       

  장 볼 때 꼭 들르는 곳이 있다. 4년 전, 약국이었던 자리에 생긴 야채· 과일 가게이다. 간판도 없고 상호도 없는 이곳에 갈 때면 아이들에게 ‘지하철역 앞 야채가게’에 간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 그 빵집 앞에 있는?” 나에게는 지하철역이 중요하고 아이들에게는 빵집이 더 중요한가 보다. 


  오늘 오후에도 그곳에 들러 싱싱해 보이는 청경채와 귤, 붉은 콩을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깜박하고 장바구니를 안 챙겨 와 “봉투도 주세요.” 말하고 보니 계산하시는 분이 바뀌었다. ‘오래 일하셨는데 언제 그만두신 거지?’ 속으로 서운해하는 사이 청경채와 귤, 콩의 가격이 포스기에 재빠르게 찍혔다. 


  지갑에서 카드를 찾아 내미는데 작은 봉지 안에 야채와 과일이 빠르게 담긴다. 그때 내 시야에 도토리묵이 들어왔다. 뒤늦게 “이것도 살게요” 하니 아주머니께서는 순식간에 더 큰 봉지를 꺼내 묵까지 단번에 옮겨 담아주셨다. 곧바로 도토리묵이 포스기 화면에 추가되었고 총만원이라는 돈이 영수증에 찍혔다. 


  속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새로 오신 분도 손이 엄청나게 빠르다. 뒤늦게 뭘 추가하거나 뺀다고 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모습이 멋있다. 전에 계시던 분도 그랬다. 작은 가게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몰려도, 계산대에 야채나 채소가 산처럼 쌓여도 끄떡없다. 옷을 단단히 껴입으신 것도 서 계신 모습에 빈틈이 없어 보이는 것도 비슷하다. 두 분 모두에게서 프로의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채소나 야채는 큰 마트에서 사지 않는다. 이곳의 물건이 더 싱싱하고 싸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좀 으스대기 위해서 간다. 여기서 부추나 마늘, 근대, 브로콜리를 고르고 있으면 요리나 살림에 있어서 프로가 된 것 같다. 집에 있는 식재료에 뭘 더 해서 어떤 음식을 만들지 궁리하는 내가 낯선 한편 기특하다. 밥을 한다는 것은 결혼하고 나서 가장 큰 숙제였는데 이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시금치나 콩나물 무침도 이제야 만족할 만한 맛이 난다.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졌다.


  그러나 김치는 여전히 넘을 수 없는 산이다. 결혼 후, 김치를 담근 건 열 번도 안 된다. 양가 부모님들의 집에서 여전히 김장을 하고 대부분 가져와 먹는다. 갓 담근 김치가 먹고 싶으면 마트에서 사거나 단골 반찬가게에서 만 원어치 정도 산다. 

  간혹 이곳에서 김치 거리를 골라 높이 쌓아놓고 배달을 시키는 어머님들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다. 분명 소금, 고춧가루 액젓도 좋은 것으로 미리 사 두셨을 것 같다. 손맛이 끝내주실 것 같다. 


  이때 김치 장인 어머니와 계산하시는 분의 대화 내용을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프로와 프로의 만남이랄까. 갓은 언제 들어오는지, 이번 배추는 어떤지, 파는 또 왜 이렇게 비싸졌는지 디테일한 내용의 대화가 무심하고 시크하게 오가는 걸 보면 저절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면 평소 관심도 없던 청갓이 보고 싶어지고 파의 가격에 의문을 품게 된다. 더 나아가 나는 과연 저런 대화가 가능한 ‘급’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잠깐 심각해지기도 한다.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준대도 4~5년 안에 프로의 세계에 진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시퍼런 이파리들 이것저것 가득 고르는 어머님들 뒤에서 나는 만년 신입사원 느낌이다. 게다가 커다란 무 위에 싱싱한 배추, 그 위에 생강, 그 위에 쪽파. 이런 식으로 탑을 쌓아 올린 김치 거리들을 휘리릭 묶어 포장하는 가게 아주머니의 일 처리 솜씨를 보면 저절로 고분고분해진다.  




  계산대 앞에서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군다. “포인트 번호가?” 뒤에 말이 생략됐지만 기분 나쁘지 않다. 결코 무례한 톤이 아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행인들의 떠드는 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나는 또박또박 큰 소리로 대답한다.  


  그렇게 장을 보고 나오면 박하사탕을 입에 문 듯 상쾌하다. 모든 게 선명하고 확실한 프로의 세계에 잠시 발을 담갔다 뺀 기분이다. 뭔가 굉장한 것들을 엿보았다는 느낌도 든다. 프로의 세계를 엿보는 건 즐겁다. 부단한 노력과 인내, 깊은 애정으로 단단해진 누군가의 삶은 그 자체로 타인에게 용기와 힘을 준다.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매일매일 열심히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잔뜩 얻을 수 있으니 안 가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푸릇푸릇 싱싱한 채소만큼은 꼭 거기서 산다. 햇 꿀고구마, 제주도 양배추, 흙당근, 공처럼 동그란 조선호박. 계절의 변화를 진열대를 보며 확인하는 즐거움도 크다. 흙냄새도 맡고 자연의 색으로 눈 호강도 한다. 이래저래 나는 ‘역 앞 야채가게’의 확실한 단골일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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