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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늑한 서재 Jan 01. 2022

07. 엄마의 성장통

-삶의 테두리가 더 선명해졌다.

큰 아이가 손목을 데었다. 미술 과제를 하던 중에 촛농 같은 글루건액이 손목에 떨어졌다. 소아과로 갔더니 대학병원으로 가란다. 10분 거리에 있는 큰 병원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괜찮아? 많이 아파?” 나는 놀라 정신이 없는데 아이는 침착했다.


치료가 시작되고 의사는 아이 손목에서 너덜거리는 피부 조각을 떼어냈다. 틀림없이 아플 것 같아 나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나를 휙 돌아보며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엄마, 나 안 아프니까 하지 마.” 예상 밖의 단호함에 간호사와 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날, 오전 8시 30분에 병원에 가야 했다. 오후에는 예약이 꽉 찼다고 해서 온라인 수업 시작 전에 예약을 잡은 것이다. 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아이는 1교시에 늦기 싫다며 뛰어가겠다고 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도 드렸으니 괜찮다고, 넘어져서 손을 잘못 짚으면 어떻게 하냐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멀지도 않은 집, 같이 걸어가면 좋을 텐데….’ 나는 달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년 사이 아이들이 부쩍 컸다. 둘째도 어린 티를 차츰 벗고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덩달아 나의 역할도 조금씩 줄고 있다. 기분이 묘하다. 분명 우리는 트랙 위를 같이 뛰고 있었다. 많은 시간, 내가 아이들을 앞에서 이끌거나 뒤에서 등을 밀어주며 함께 달렸는데 지금은 아니다.


아이들은 차례대로 내 손을 놓고 트랙을 홀로 달리기 시작했다. 큰 아이는 점점 속도를 높이는 중이고 막내는 뛰면서 나를 종종 돌아본다. 그러나 이 녀석도 곧 자기만의 리듬을 찾을 것 같다. 아이들은 신나 보이는데 나는 어색하다. 잘 커주었다는 기쁨, 자랑스러움도 있지만 사실 요즘의 나는 성장한 아이들에게 새롭게 적응하는 중이다.  


다행인 건, 변화와 성장 사이 여전히 사랑스러운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밤에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둘째가 다가와 등을 툭 두드리며 말한다. “엄마, 오늘 잘했어.”지쳐있다가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뭘 잘했어?” “그냥, 다.” 그러면서 나를 꼭 안아준다. 무심한 표정으로 공부하던 첫째도 슬며시 다가와 볼을 내민다. 우린 둘 다 안경을 쓰기 때문에 뽀뽀를 하면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또 웃음이 난다.  



5년 전...아이들 곁의 아름드리나무. @ 스탠포드 대학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종종 긴 산책을 나섰다. 집이 있던 약수역을 지나 신라호텔, 태극당, 리틀장충야구장을 거쳐 국립극장까지 오르는 코스였다. 분주하던 도심의 풍경이 야구장쯤 오르면 바뀌었다. 도로 양 옆에 늘어선 키 큰 플라타너스 잎은 손바닥을 두세 개를 붙여도 남을 만큼 컸다. 국립극장까지 오르는 길은 남산의 가장자리로 나무가 빼곡하고 풀잎도 무성했다.


뱃속 아이와 함께 그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평일 오후, 그곳은 인적이 드물어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았다. 분명 난 혼자인데 둘이었다. 사각사각 밟히는 마른 잎사귀, 흔들리는 사철나무 잎 하나하나 다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늦여름부터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산책이 이어졌다. 물론 아이는 그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짝사랑이 또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사랑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는 여러 면에서 아빠를 닮아가고 있다. 내 편이었던 동지가 반대편 진영으로 등을 돌린 것 같다. 너무 유치한가? 그러나 남편과 함께 있으면 그 생각이 쏙 들어간다. 아직도 그 사람은 아이들에게“엄마가 싫어, 아빠가 좋아?”라고 묻는다. 큰 애는 피식 웃고 말지만 둘째는 큰 소리로 “엄마가 좋아!”해준다.




두 아이 덕분에 삶의 테두리가 선명해졌다. 오래전의 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색무취의 인간이었다. 색을 갖지 않았던 건 선명하게 나를 표현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의 색으로 나를 물들일 수 있어 편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게 알록달록한 색을 입혔다. 오색찬란한 색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아이가 이건 좋고 저게 싫다 하면 어떤 건 남기고 어떤 건 버렸다. 아이들은 내게서 자기만의 색을 잘 찾아나갔다. 이제 나만의 색을 가려내 정돈하면 된다. 홀가분한 감정이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최근 제대로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건강도 지키고 싶다. 트랙 밖이면 어떤가. 아이들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 뛰다 지쳤을 때 한 번씩 내게 와서 충전하고 갔으면 한다. 그러나 정체되고 싶지는 않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엄마, 여자, 인간이었으면 한다.


내 삶은 더 이상 가볍지 않다. 두 아이는 내게 돌풍을 잠재우는 신의 입김. 흔들리는 삶을 고정시켜 주는 묵직한 닻이다. 먼지처럼 부유하던 내가 세상 한 가운데 닻을 내리고 신나는 모험을 즐겼다. 아이들과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트랙 위, 아이들의 등에 무언가 조금씩 자라는 것 같다. 이제 뛰는 아이들의 등에 커다란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기승전결의 ‘기’부분이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



 '일상에서 에세이 쓰기' <한겨레 문화센터>  과제 - 상징이 있는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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