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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늑한 서재 Dec 01. 2021

03. 사과 지우기

- 엄마 & 프리랜서 작가의 재택근무 필살기... 

 끼니때가 되어 쌀을 씻는다. 스테인리스 볼에 쌀 세 컵 반, 잡곡을 소량 섞은 뒤 물을 충분히 붓는다. 손으로 저어 희뿌옇게 일어난 물을 두세 번 버린다. 뽀얗던 쌀뜨물이 맑아졌을 때 내솥에 쌀을 붓고 밥물을 맞춘 후 밥솥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타이머를 10분에 맞춘다. 알람이 울리면 압력취사를 누를 예정이다. 


  지금부터 내게 허용된 시간은 30분이다. 쌀을 불리는 시간 10분, 밥통이 알아서 밥을 하는 시간 20분. 그 시간 안에 찌개나 국, 반찬을 빠르게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나와의 승부. 식사 준비에 30분이 훌쩍 넘어가면 패, 30분 안에 마치면 승.     


  타이머의 시간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바라보며 냉장고 문을 다급히 연다. 음식 재료와 김치, 밑반찬을 한꺼번에 꺼낸다. 칼 도마를 꺼내 재료를 용도에 맞게 재빨리 손질한다. 그때쯤 타이머가 10분이 지났다고 알려준다. 젖은 손으로 밥솥의 압력취사 버튼을 누르고 본격적인 요리를 시작한다.  


  손질해둔 재료로 국물이 있는 음식 하나, 볶거나 졸이거나 찌는 메인 반찬 하나를 해낸다. 빨리 만들었기 때문에 맛의 깊이는 없다. 아쉬우면 msg를 적당량 넣어 감칠맛을 내면 된다. 다 괜찮다. 30분 안에 식사준비를 마칠 수 있다면. 


  “쿠쿠” 뻐꾸기 밥솥이 제 이름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한다. 곧 증기를 내뿜는 인공적인 사운드가 밥솥에서 흘러나온다. 안에 꽉 찬 진짜 증기가 배출되는 건 그 다음이다. 치지직, 치직. 천장을 향해 뜨거운 증기가 솟아오르면 나는 싱크대 위의 상황을 점검한다. 찌개는 완성 되었는가? 조린 감자나 구운 고기는 다 익었는가? 양념장이 필요한가? 


  그때쯤 밥통은 증기를 다 내뱉고 뜸을 들이고 있다. 밥이 다 되었다는 알림음이 흘러나오기 전에 재빨리 상을 차린다. 그리고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초등 남매에게 소리친다.    “얘들아, 밥 먹어! 하던 것 끊고 빨리 나와. 뜨거울 때 먹어!” 


  밥을 퍼주기도 전에 뜨거울 때 먹으라고 성화를 부리지만 말투와 달리 내 마음은 평온하다. 30분 안에 해냈다는 승리감, 성취감. 적어도 한 끼는 제대로 먹였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다. 정작 나는 내가 한 밥에 끌리지 않는다. 컵라면 아니면 샌드위치나 한 입 먹고 싶다. 시원한 콜라 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밥과 원수지간이 된 것은 작년 2월부터다.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아이들은 등교하지 못했고 남편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1년간 일을 놓았다. 늘 아이들이 집에 있었다.  


  한창 크는 초딩남매는 종일 먹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할 새도 없이 나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싱크대 앞에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었다. 통장은 텅장이 되었고, 스트레스는 나날이 쌓여만 갔다. 자존감 하락은 덤으로 딸려왔다. 코로나 할아버지가 와도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에게 연락해 차기작 계약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작업 노트에 연필이나 펜으로 사과를 몇 개 그려놓는다. 타이머로 20분을 맞춰놓고 일을 하다가 알람이 울리면 사과를 하나 지우고 5분에서 10분 정도 쉰다. 다시 타이머를 20분 맞춰놓고 글을 쓰다가 알람이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지개도 펴고 둘째에게 간식도 챙겨준다. 


  마음 가볍게 사과를 하나 둘 씩 지우다보면 결국 일에 몰입하게 된다. 타이머의 20분은 나의 심리적 마지노선이다. 20분 정도는 채울 수 있으니 일단 시작해보자. 동기부여도 된다. 사과 지우기를 통해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과의 싸움, 나와의 싸움에서 이겼을 때 나는 어깨가 쫙 펴진다. 내가 멋지게 느껴진다.  @     


- '일상에서 에세이 쓰기' 한겨레 문화센터 / 과제1 '내가 멋지다고 느끼는 순간'       

        

https://brunch.co.kr/@pach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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