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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늑한 서재 Nov 30. 2021

02. 나를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

- 에세이 주제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대한 탐구

주제를 받고 강의실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탐구가 시작되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내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순간이라니... 처음부터 아주 100% 솔직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나를 포장할 수 있으면서도 거짓이 아닌 이야기 소재를 찾고 싶었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생각을 수정하려 드는 버릇이 있다. '아하하, 멋지긴. 이거 원~ 쑥스럽구만. 저는 원래 그렇게 멋진 사람이 아닙니다. 상황이 그렇게 나를 보이게 만들 뿐.' 이게 나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드는 진짜 나의 속마음이었다.


그러나 첫 시간, 첫 과제부터 나를 과감하게 내보이긴 싫었다. 지나치게 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용의 글을 육성으로 읽는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내밀한 속마음 위에 얇은 천을 하나 올려놓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 했다. 시선을 내 마음에서 바깥쪽으로 돌려보았다.




떠오르는 주제들을 창작노트에 써 보았다.


내게는 창작노트가 있다. 줄없는 종합장인데 이곳에 만년필로 아이디어를 끄적거리곤 한다. 당시 썼던 것들을 좀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막막함은 사라지지 않고...


후보1/ 생방송이 시작된 뒤,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그 순간


라는 제목 밑에 엉뚱한 이야기들을 잔뜩 갈겨 썼다. 못봐주겠다. 일단 주제를 써 놓고 떠오르는 아무 이야기나 끄적인 것 같다. 웃긴다. 뭐 이런 걸 썼냐며 그 때의 나를 좀 비웃어주었다. 두 장을 더 넘겨본다.


후보2 / 몰입


풉. 더 웃긴다. 생뚱맞다. 게다가 첫 문장은 완전 오글거린다. '몰입의 순간을 즐기는 내가 멋있다. 이야기 속에 빠져 글을 짓는 내 모습이 참 좋다.' 영원한 이불킥감이다. 그 밑에 이어진 글을 읽어내려가는 내 눈까지 간지럽다. 간혹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감상적인 글을 쓸 때가 있다. 이것대로 재미는 있지만...  한 열 줄 정도 쓰다가 영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좀 떨어진 곳에 "거침없이 쓰고싶다" 라고 써놓았다. 그 때의 나, 너무 고민을 열심히 한다.


시선을 더 내려보니 떠오르는 주제들을 표로 정리해놓았다. 첫 번째 칸에는 '라디오 시절, 생방송이 끝나고.' 두 번째 칸에는 '(로맨스 소설) 원고를 마치고 출간이 되었을 때.' 세 번째 칸에는 '수업 끝나고 나오는 길' 이라고 썼다. 다 무언가를 끝내고 성취감을 느낄 때의 내 모습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금, 아주 조금 내가 뭘 쓰고 싶어하는지 감이 온다.


그리고 위 세 가지 주제를 다 연결해보려는 노력의 흔적도 엿보인다. '성취감'을 키워드로 세 가지의 이야기들을 한 꼬챙이에 꽂으려 한 노력은 그러나 수포로 돌아갔다. 주제 하나에 덩어리가 큰 이야기를 세 개 씩이나 넣으려고 하다니 욕심이 지나쳤다.


뒷 장을 넘겨본다. 다행히 결론이 도출되었다. 첫 번째 주제글로 쓴 '사과 지우기'에  대해 언급이 되어 있다. 메모를 옮겨 보자면...


창작노트는 휘갈겨써야 제 맛 아닙니꽈~~ (원래 악필 아님, 진짜 아님.)


"무언가 집중하던 일이 잘 끝났을 때의 성취감 -> 어떻게 그릴 것인가 -> -> -> 몰입의 시간 -> 사과를 지움"


나와 함께 수업을 들었던 분들이 읽는다면 내용을 아시니 빙그레 웃을지도 모르겠다. 위의 메모 아래에는 이런 글을 써놓았다.


"... 나는 무수히 많은 사과를 그리고 있었던 것. 앞으로도 수많은 사과를 그리고 지우겠지. 사과 하나에 50분이던 시간이 지나가고 이제는 20분이 되었지만. 시간의 길고 짧음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사과가 있다는 것, 사과를 그리고 지울 수 있는 날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쁜 요즘."


여기까지 쓸 때만 해도 '마감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사과 지우기'는 내가 얼마나 일을 했는지 알려주는 지표다.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글을 쓰려니 집중이 되지 않아 고안해낸 방법이다. 작업노트에 사과를 몇 개 그려놓고 타이머를 20분으로 맞춰놓는다. 20분이 지나면 사과를 하나 지우고 5분에서 10분 정도 쉰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나중에는 사과지우기가 필요 없어진다. 저절로 일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사과 지우기' 이야기는 내 블로그에 먼저 글을 올리고, 그 글을 한글 프로그램에 옮겨 몇 번이나 손을 보곤 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재미있어 한 일이다. 그렇게 주제와 내용이 잡혔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잘 풀리지 않았다. 도입을 좀 잘 쓰고 싶었다. 로맨스 소설을 쓸 때 나의 강점은 도입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것이었다. 에세이도 그러고 싶었다. 에휴. 마음을 좀 가볍게 먹을 것이지. 역시 잘 하고 싶은 일에서는 힘 빼는 게 어렵다.


이것저것 써보다 결국 첫머리를 엉뚱하게 써내려갔다. 제목을 '사과 지우기'라고 해놓고 '사과' 이야기는 없는 첫 문단... 마감시간을 한 시간 반 정도 남겨두고 새롭게 써내려갔다. 앞서 여러 번 손을 보았다고 한 부분은 뒤에 아주 조금 넣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고...


"끼니때가 되어 쌀을 씻는다. 스테인리스 볼에 쌀 세 컵 반, 잡곡을 소량 섞은 뒤 물을 충분히 붓는다. 손으로 저어 희뿌옇게 일어난 물을 두세 번 버린다. 뽀얗던 쌀뜨물이 맑아졌을 때 내솥에 쌀을 붓고 밥물을 맞춘 후 밥솥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타이머를 10분에 맞춘다. 알람이 울리면 압력취사를 누를 예정이다."


A4용지 10포인트로 한 장 조금 넘는 분량의 글을 썼다. 결국 마감시간을 20분 정도 넘기고 말았다. 목요일 자정 00시 20분, 에세이 첫 과제는 그렇게 내 손을 떠났다. ('사과 지우기'는 다음 편에...)




어린 친구들과 수업을 할 때 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친구들 나이에 가장 잘 쓴 글은 솔직하게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고. 마음과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냈을 때 칭찬을 많이 해주고 별 여러 개를 시원하게 그려준다. 내가 다소 답답했던 유년시절의 돌파구를 읽고 쓰는 것에서 찾았기 때문에 저절로 강조하게 되는 듯 하다.


주저하며 감추려 했던 감정이나 생각을 꺼내고 지지받았을 때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 환해지는 표정을 보면 나까지 짜릿해진다. 속이 시원하고 숨통이 트인다는 얼굴이다. 아이들을 통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의 힘을 간접경험한다.


나는 혼자 보는 일기쯤이야 얼마든지 솔직하게 쓰지만 보여주는 글에 대해서는 문제를 겪고 있었다. 얼마나 어디까지 솔직할 것인가. '내 속에 너무도 많은 나' 가운데 누구를 어디까지 꺼내보여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인식하는 방향의 기준을 만들고 싶었다. 어디까지 솔직할 것인가는 곧 글의 톤과도 연결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찾기 위해 기준없이 나를 드러내보고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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