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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에최 Nov 24. 2023

남자 없는 여자들

1. 설명의 짐

아이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로 서점에 갈 일이 생기면 자연스레 유아·어린이 섹션을 가장 먼저 들르곤 한다. 오늘은 나를 위한 책만 사야지, 다짐하는 날에도 서점을 나서는 두 손에는 어김없이 아이에게 읽어줄 책들이 들려있곤 했다. 처음으로 어린이 도서 섹션을 기웃거리던 날,  생각보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에 놀라고 말았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책, 생활 습관을 다루는 책부터 가족 간의 사랑, 배려와 우정, 만남과 헤어짐, 외로움과 결핍, 생태계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책까지.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관심을 끄는 책들은 외로움이나 결핍 같이 명도가 낮은 감정을 다루는 책들인데, 인생의 어두운 부분일 수 있는 이 감정들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풀어내는지가 궁금했다.    

      

「알사탕」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친구들이 같이 놀아 주지 않아 외로운 동동이는 혼자 구슬치기를 하며 놀다 어느 날 문방구에서 구슬처럼 생긴 알사탕을 사게 된다. 알사탕 하나를 입에 넣는 순간 집 안에 놓인 소파가 궁시렁대는 말이 들린다. 알사탕을 하나씩 먹을 때마다 강아지가 하는 말이 들리고 무뚝뚝하고 잔소리만 하는 아빠의 속마음(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이 들리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 거는 말이 들린다. 마지막 남은 사탕은 입에 넣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자 동동이는 저 멀리 보이는 친구에게 다가가 자기가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한다. “나랑 같이 놀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책에서는 다른 친구들처럼 말을 매끄럽게 하지 못하는 아이가 나온다. 아이는 학교에서 말할 일이 없기를 바라며 가장 뒷자리에 앉는다. 발표 시간에는 다른 친구들의 키득거리는 웃음과 눈빛을 견뎌야 한다. 발표를 마치고 학교에서 나온 아이의 얼굴을 본 아빠는 아이를 강가에 데려간다. 말없이 함께 걷다가 눈물이 차오르는 아이에게 너는 저 흘러가는 강물처럼 말한다, 고 알려준다. 너는 굽이치고 소용돌이치는 저 강물처럼 말한다고. 아이는 두려움으로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아빠의 말을 떠올린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채근이나 지시, 조언보다는 두려움에 공감해주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일이라는 것을, 이 책들을 보며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린 내가 떠오른다. 나도 꽤나 자주 우는 아이였다. 울음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유치원 때였다. 5살 즈음의 나는 유치원에서 한 학기를 마친 기념으로 나누어준 두꺼운 사진 앨범을 가지고 혼자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앨범이 너무나 무거워서 울음을 터졌다. 그 무게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앨범을 두고 혼자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진첩을 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나. 그 앨범은 끝까지 사수될 수 있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감당할 수 없는 짐에 짓눌려 버린 어린 나의 절망감만 떠오른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곧잘 울었다. 주로 남자아이들이 놀려서였던 것 같다. 학교 정문 아래로 울면서 집으로 향하는 나의 모습이 기억난다.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울었던 건 중학교에서 단짝 친구가 나를 두고 다른 아이들과 운동장으로 나갔을 때였다. 어딜 가든 늘 같이 다니던 친구와 사이가 묘하게 소원해지던 즈음이었는데 곧바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섭섭함이 폭발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15살 때까지만 해도 언어로 설명하는 것보다 눈물로 시위하는 게 익숙했던 셈이니 아직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아이가 울음으로 말을 대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나와 비슷한 성향이라면 더 그렇겠고.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이럴 때는 나의 말보다 책의 언어를 빌리는 게 효과적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읽어주려고 구매한「울지 말고 말하렴」이라는 책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아기곰의 이야기이다. 아기곰은 장난감이 고장 났을 때, 친구들이 자신을 빼고 놀고 있을 때, 무언가를 갖고 싶을 때마다 울어버린다.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서 그것을 얻는 친구들과 달리 울기만 하는 아기곰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아기곰은 말을 하기 시작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시작한다.   

        

 울고 있는 아기곰의 얼굴에 어린 아들, 어린 나, 그리고 지금 내 얼굴이 겹쳐진다. 울기만 하면 아무도 네가 왜 우는지, 너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 계속해서 말해준다.           


울지 말고 말해봐. 너가 원하는 것을.

아무도 모르지, 너가 원하는 것을.

말을 해도 괜찮아.

부끄러운 게 아니야.

아무도 상처받지 않아.

아무도 너를 떠나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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