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가정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번 주 화요일까지 2024학년도 유치원 입학대기 신청 기간이다. 내년이면 3세가 되는 아이가 있어 우리집도 어린이집이냐 유치원이냐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현재 다니는 어린이집에도 큰 불만 없이 잘 다니고 있지만, 유치원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주어지니 또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차이를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보육시설과 교육시설로 분류되고 이에 따라 관할부서도 복지부와 교육부로 나뉜다고 했다. 관련 법도 <영유아보육법>과 <유아교육법>으로 달랐다. 관련 명칭도 상이하다. 어린이집은 입소이고 유치원은 입학이며, 어린이집의 연장반에 해당하는 것은 어린이집의 방과 후 과정이다. (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은 채 글을 썼다가 아마도 유치원 교사로 추정되는 독자들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이 글에서는 고쳐 쓴다) 미취학 아동에 대해 보육과 교육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실익이 무엇일지 의문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하니 일단 정보를 머리에 입력시켰다.
그러다 유치원은 '오후 1시 30분이면 하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경악하기도 했다. 아니, 그러면 퇴근할 때까지 아이를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건가.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다행히 맞벌이 가정은 '방과 후 과정'을 신청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마음이 급해져 바로 유치원입학관리사이트에 들어가 입학대기를 신청을 해보려 했지만 아무리 봐도 관련 링크를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일년 내내 입소대기 신청이 가능한 어린이집과 달리, 유치원 입학신청은 정해진 기간이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 달력에 표시를 해두었다.
어린이집에 계속 다닐지, 유치원으로 옮길지의 갈림길에 서고 보니 내겐 정보가 너무 없었다. 온라인을 통해 기본적인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주로 '맘카페'라 불리는 지역 기반 온라인 커뮤니티를 이용했다. 역시나 같은 갈림길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또는 하고 있는 보호자들이 많았다. 어린이집이냐 유치원이냐. 이에 대한 경험자들의 의견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누리과정이라는 교육과정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모두 공통사항이니 맞벌이가정이라면 어린이집이 낫다, 생일이 빠른 아이라면 유치원이 더 좋다 등등. 정해진 답은 없었다.
맘카페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정리해보니 유치원은 내용적인 특색이 저마다 뚜렷해 보였다. 놀이 중심 철학으로 인기가 있는 유치원이 있었고, 숲체험으로 유명한 유치원도 있었으며, 영어나 음악, 미술, 코딩 등 다양한 외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유치원도 있었다. 관심이 가는 유치원에 순서대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늦어도 5시나 6시까지는 하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퇴근하고 아무리 빨리 가도 6시 30분은 되어야 하원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어린이집에 계속 다녀야 하는 건가, 체념하던 차에 다시 한번 검색을 시도했다. 키워드는 '워킹맘, 유치원'. 검색해보니 근처에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이 있는데 7시 넘어서까지 운영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고 상담을 잡았다.
찾아간 유치원은 초등학교와 건물을 같이 쓰고 있었다. 상담을 해주신 조곤조곤한 말투의 여자 선생님은 유치원의 장점과 병설 유치원의 특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먼저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근무환경이 달랐다. 어린이집의 경우 한 담임선생님이 9시부터 4시까지 약 7시간 정도 아이들을 돌봐주신다. 2세반의 경우 한 반의 정원이 7명이니 선생님은 최대 7명의 아이를 돌봐야 한다. 반면 유치원은 정규수업시간이 끝나면 선생님이 교체된다. 상담해주신 선생님은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이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더 신경 써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병설 유치원의 특성상 사립유치원처럼 화려한 외부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없는 것이 선택의 걸림돌이 되는 모양인지 선생님은 놀이의 중요성을 연신 강조했다. 병설 유치원 선생님들은 모두 임용고시를 합격한 교사들이고, 전문적으로 놀이교육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한다고도 했다. 선생님의 말 곳곳에서 '임용고시를 합격한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충분히 놀이욕구를 충족한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며 본인의 아들을 그렇게 키웠더니 얼마 전 영재교육원에 합격했다고 만면의 미소를 띤 채 슬쩍 덧붙였다. 영재교육이 탐나는 건 아니지만 놀이교육 중심이라니 이건 합격점. 또 무시 못할 한가지.보호자들이 병설 유치원에 납부해야 하는 금액은 0원이라고 한다. 공교육으로 간주되어 그런 모양이었다. 인건비는 모두 교육청에서 지급받기에 안정적으로 아이들을 위해 나머지 금액을 투자할 수 있다고.
상담하고 보니 연령별로 반이 구분되어 있는 점(어린이집에 계속 보낸다면 3~5세 통합반을 다녀야 한다),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봐준다는 사실과 놀이 중심이라는 점, 넓은 공간이 있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 맞벌이 가정에는 선택지가 없다
국립, 공립, 사립, 단설, 병설.. 각양각색의 유치원을 두고 머리가 잠시 아팠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을 깨닫고 나니 일순간에 정리가 되었다. 그것은 맞벌이하는 가정에게는 사실상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는 것.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아이를 퇴근할 때까지 맡길 수 없다면 그 유치원은 더 볼 것도 없이 선택지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보육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린이집을 선택할 때엔 보육시간이 아닌 어린이집의 운영철학이라든지, 주변환경, 구성원과 같은 다른 부분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사이의 긴 고민 끝에, 일단 상담을 다녀온 병설 유치원에 입소대기를 신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 있었다. 오후 7시 30분까지 있을 수 있는 방과 후 과정을 선택했더니 모집인원이 '1명'이라고 뜨는 게 아닌가.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에 지원한들, 수많은 맞벌이 가정 중 우리가 당첨될 확률을 점쳐볼 수나 있을까. 맞벌이 가정에게 결국 선택지란 없는 것이었나.
게임도 이런 게임이 없다. 게임보다는 도박에 가까운 승률. 아이의 보육과 교육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운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말도 안 되게 느껴졌다. 유치원에서 떨어진다면(떨어질 확률이 더 높겠지만) 어린이집을 다녀야 한다. 선택해서 어린이집을 다니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닌 3년 동안 사랑으로 아이를 예뻐해주신 첫 선생님부터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보호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어린이집을 만나 마음 놓고 직장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이후 어린이집 폐원과 다른 어린이집으로의 이동, 또 적응... 여러 문제에 맞닥뜨렸지만 신뢰할 수 있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존재와 외부 프로그램 비용을 제외한 어린이집 보육비 전액을 지원해주는 무상보육시스템에 감사해하며 지냈다.
그렇지만 어린이집과 관련된 좋은 경험과는 별개로, '맞벌이 가정'이라는 이유로 애초에 선택지를 박탈당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 무척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 노동시간 단축을 포함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퇴근 후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나면 어느새 자야 할 시간이 되고 말지만 그래도 아이를 퇴근할 때까지 돌봐주는 시설이 있어 일과 육아를 병행해 왔다. 하루에 절반을 어린이집에서 보내는 아이가 안쓰럽고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육아를 위해 원하지 않는 휴직이라든가 퇴직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서는 보호자 중 누군가 아이를 일찍 데려올 수 있거나, 직장이 없거나, 도와줄 또다른 가족이 있거나,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 현실이다.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일들이다. 소위 '경력 단절 여성'을 양산해내는 현실이라고 밖에 표현이 안 된다.
지역소멸이다 연금고갈이다, 저출생의 사회적 문제가 코앞으로 닥친 지금이야말로 OECD 평균 수치를 훌쩍 웃도는 대한민국 노동시간의 단축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이다.
보호자들이 직장일을 다 마칠 동안, 그러니까 하루종일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아이와 보호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양질의 시간을 확보하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금처럼 지원금을 뿌리는 것보다, 출생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기에 지역별 영유아 인구수와 영유아를 돌보는 맞벌이 가정수 등을 종합해 현실이 반영된 시설 운영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당장이라도 유치원의 방과 후 과정의 모집인원을 현실화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정부는 이를 위해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집에 대해서도 유치원에만 실시되고 있는 무상급식을 도입하고 교사 수 증원과 같이 교사들의 근무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오래 전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이원적 체계를 일원화해 관리의 책임을 집중시키고 통일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근본적으로 보육과 교육의 격차를 좁혀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왔다고 들었다. 지난 대선 시기에 각 당의 후보자들은 이러한 유보통합(영유아 교육·보육 통합)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은 유보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 정부의 유보통합 정책은 지지부진한 채로, 여전히 사회적 합의를 못 이끌어내는 모양새다. 얼마 전에는 관련자들의 의견 수렴 없는 일방적인 학제개편(입학연령 만5세로 변경)을 발표했다가 각계의 비판에 직면한 뒤 정책을 어물쩍 폐기한 적도 있었다.
돌봄·교육 노동에 종사하는 교사들의 의견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만 보며 계속 미뤄져 온 유보통합정책은 그 무엇보다 영유아의 안전과 행복, 차별없이 교육받을 권리를 중심에 두고 설계되고 추진돼야 한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교사들, 그리고 영유아를 양육하는 보호자들의 의견과 현실이 꼼꼼하게 조율되어 반영된 영유아 정책이 시급하다.
선배 엄마들은 고군분투하는 후배 엄마들에게 '결국 어떻게든 지나가더라' 라는 말을 해주곤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이를 기르며 행복했다,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