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자 없는 여자들(2) - 공주
외가집 여자들이 할머니집에 모여 다 같이 산 적도 있었다. 이쁜이 할머니와 함이 이사를 가면서 남는 방에 아빠가 지방으로 떠나면서 서울에 남겨진 엄마와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모는 또 다른 세입자로 우리와 할머니집을 공유하게 되었다. 한 지붕 네 여자. 과연 남자 없는 여자들 천하였다.
이모는 미혼이었고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아이가 없는 이모에게 조카는 사랑이라고 하던데 이모도 나를 꽤나 예뻐했던 것 같다. 이모는 외갓집 사람들 중에 가장 칭찬에 후한 사람이어서 내가 어린 시절 가족들로부터 들었던 이쁘다거나 똑똑하다거나 같은 칭찬의 말은 대부분이 이모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애칭을 지어 준 사람도 이모다. 갓 태어났을 때 얼굴이 동그랬다나, 그래서 방울이라 불렸다. 집안의 유일한 아이이자 조카였던 나를 귀여워했던 것과는 별개로 이모는 뭔가를 나누는 데에 있어 그리 너그러운 캐릭터는 아니었다. 특히 음식에 있어서 그랬다.
퇴근한 이모가 부엌의 커다란 식탁에 혼자 앉아 라면을 먹던 게 기억이 난다. 이모는 떡과 계란, 대파가 듬뿍 들어간 라면을 전부 빨아들일 기세로 먹고 있고 나는 그 광경을 부엌의 문턱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모가 끓인 라면이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이던지 한 입만 먹고 싶었다. 이모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한입만 달라고 했다면 ‘아, 나 엄청 배고픈데~’ 라고 생색을 내며 한 젓가락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매번 용기를 내지 못했고 이모는 매번 라면을 먼저 권하지 않았다.
나와 달리 이모는 한입만 달라는 말을 아주 쉽게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면 꼭 옆에 와서 한입만 달라고 하고는 아주 큰 한입을 가져갔기에 여간 신경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하는 모습에 빈정이 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고작아이스크림 한입 달라는 부탁을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못해 이모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낼 때마다 표현은 못 했지만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마침 혈액형이라는 것이 아이들 입에 오르내릴 때 즈음 그것이 나의 명분이 되어 주었다. 사실 피와 침은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는 같은 혈액형이 아니면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없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마침 나는 A형이고 이모는 B형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공식적으로 공유할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나에게도 할 말이 생긴 것이다! 혈액형이 음식을 공유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건만 이모는 나의 말을 이해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그러면 아주 조금만 먹을게~’라며 본인의 의사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이모의 눈은 동그랗고 옅은 쌍커풀이 져있다. 그건 아마도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눈인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할머니의 눈은 영민함을, 이모의 눈은 순진무구함(혹은 그것을 가장한 어떤 것)을 품고 있다. 조금 긴 듯한 얼굴형도 할머니를 닮았는데 할머니보다 턱이 뾰족하다. 단호하게 떨어지는 선이 많은 엄마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엄마는 자신보다 일곱 살 어린 동생을 말 그대로 업어 키웠다는데, 자기 동생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고 생각했단다. 아마 얼굴이 길다는 이유로 나는 종종 이모와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그 말이 썩 듣기 나쁘지 않았다. 이모는 화장도 옷차림도 화려했다. 과감한 패턴의 스카프, 커다란 귀걸이, 파란 아이셰도우. 모두 엄마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소위 ‘예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예쁜 걸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편의상 여기에서는 전자의 사람들을 ‘공주’라 칭하겠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이렇다. 좋은 것 앞에서 마음에 들었다는 티를 잘 내지 않는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라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데 알고 보면 그 반대다. 좋은 마음을 내색하지 않아 상대를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건 ‘밀당의 기술’이다. 이 기술의 기본 원리는 나의 패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궁금하게 만들고 계속 생각하게 만들어 주도권을 가져가는 것인데, 공주들은 경험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이 기술이 대다수의 사람(남자)들에게 통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술에는 함정도 있는데 그것은 기술이 과도하게 적용되거나 사용되었을 때, 또는 상대가 플레이어의 예상과 달리 끌려다닐 생각이 없을 때에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공주타입의 이모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알 듯 말 듯 한 반응을 보인다. 한번은 남편이 운영하던 식당에서 처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는데 이모가 별말 없이 새침하게 젓가락질만 하길래 그다지 입맛에 맞지는 않은가, 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다. 그러고서는 언젠가부터 틈만 나면 그 음식이 생각난다며 식당 갈 일 없냐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또한 공주는 본질적으로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받은 일에는 익숙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불필요할 정도로 생색을 낸다. 이모가 “내가 엄~~청 아끼는 건데” 라고 운을 띄우며 무언가를 만지도록 허락하거나 줄 때 그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다지 엄청난 물건이 아닐 때가 많다. 이모의 이러한 공주 캐릭터가 유별나게 느껴졌던 까닭은 외가댁에 이모 말고는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모는 예나 지금이나 맥시멀리스트이기도 해서 이모의 공간에는 온갖 물건들이 넘쳐났다. 이모의 방은 보물섬 같았다. 이모의 화장대 위에는 엄마에게는 없었던 갖가지 색조화장품들과 향수, 화장붓, 헤어롤, 장식품들이 빼곡했다. 화장대 서랍을 열면 금색과 은색의 귀걸이와 목걸이들이 초콜렛 박스 안에 들어 있었다. 책상에는 온갖 문구류들이 가득했는데 하나같이 동네 문방구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초록색 체크무늬의 스카치테이프와 형광색 메모지, 플라스틱 집게와 알록달록 클립들. 하나같이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을 때 둥글둥글한 느낌이 좋았고 무엇보다 냄새가 중독적이었다. 스카치테이프에서 나는 냄새는 이국적이고 세련되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것들은 지금에야 너무나 익숙한 3M의 문구들이었는데 그때 만해도 이모방에서나 볼 수 있고 맡을 수 있던 고급 문구였다.
봐도 봐도 새로운 것이 쏟아질 것 같은 이모의 방을 구경하고 있으면 이모는 조바심을 가득 담아 “그거는 내가 아끼는 건데~” “이거는 하나 남은 건데~” 라며 눈치를 주곤 했으므로 나는 이모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이모의 방을 탐색했다. 화장대 서랍에 들어 있는 악세사리를 하나씩 만져 보고 핑크색 헤어롤을 머리에 감아도 보았다. 스카치 테이프에서 나는 냄새도 실컷 맡았다. 옷장 밑 서랍을 열었을 때 발견한 파우치 속에 들어있던 반쯤 소비된 담배갑과 라이타는 이모의 비밀을 훔쳐본 것 같은 묘한 흥분을 일으켰다.
이모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예쁜 것과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할머니가 어린 이모에게 옷을 사주겠다며 시장에 데리고 갔다. 가족들이 먹을 과일은 사지 않을지언정 어려운 친인척들을 도와주며 명예롭게 사는게 중요했던 할머니에게는 좀처럼 없는 일이라 이모의 마음은 한껏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을 뒤져도 검소하지만 안목이 높은 할머니의 마음에 차는 옷이 없어 결국 아무 것도 사지 않은 채 그대로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마음이 산산조각이 난 이모는 집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고 한다. 엄마느은~ 내 마음도 몰라주구~ 서럽게 우는 이모와 그런 이모를 보며 혀를 차는 할머니의 모습이 안 봐도 그려질 것 같다.
‘학문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을 세상 제일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할머니에게 이런 막내의 소비적이고 과시적 성향은 못마땅하고 부정하고 싶은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첫째라는 이유도 컸을 테지만 할머니의 ‘적자(適子)’는 엄마일 수밖에 없었다. 학문에는 뜻이 없어 보이는 공주 같은 이모가 그 자리를 맡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유전이 힘을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하는 법이다. 막내들의 유소년시절이 흔히 그러하듯 이모는 할머니의 홀대 섞인 무관심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서러움을 키우며 공주처럼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