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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에최 Dec 11. 2023

남자 없는 여자들

6. '성공'해야 하는 사명

질문들         

 


*     


처음으로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것’에 대한 생각이 찾아온 때는 10살 무렵. 버스에 앉아 어딘가를 가던 중이었다. 혼자는 아니었지만 일인석에 앉아 있었다. 말 그대로 갑자기 단상이 나를 찾아왔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나는 누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까지는 떠오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너무나 생경한 느낌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영혼이 내 몸에서 분리되어 버스 천장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나인데 내가 아닌 느낌.      

창문을 통해 들어왔던 햇살이 따스했던 걸 보면 봄이나 가을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딸, 이모의 조카, 할머니의 손녀가 아닌 나는 누구지? 그 짧지만 날카로운 생각은 순간이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나의 유체이탈을 목격한 것 같은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사라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는 영혼이 우주로 갔다. 그곳에서 바라본 나는, 무(無)에 수렴하는 존재였다. 내가 있거나 없거나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우주는 우주 그 자체다. 지금까지 생각이 미쳐 온 범주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과 시간의 감각에 압도당해버렸다. 소멸을 거듭하는 찰나의 의미는 무엇일까.      


허무의 감각은 사람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감각이 일단 탑재되면 눈앞의 실체나 발을 딛고 있는 현실보다 초월적으로 느껴지는 허상의 존재에 끌리게 된다. 나는 일상에 실존하는 어느 인물보다도 같은 밤하늘의 달을 보고 있었을 몇백 년 전의 소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아주 오래 전에 존재했던 누군가와 현재의 풍경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전율이 일면서 애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그 소녀에게 말을 걸면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우주적인 통로가 내 안에 만들어졌다. 그건 의미와 무의미가 지배하는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점점 흥미를 잃었다. 단체 생활 중에서 참을 수 없는 건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어떻게 해도 투명인간이 될 수 없는 찬양대회나 반별 장기자랑은 고역이었다. 경쟁심과 자신감에 불이 붙은 아이들은 최고라는 찬사를 받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든 쉬는 시간을 연습에 할애했다. 아이들은 지휘하는 아이들, 그들을 동경하는 아이들, 그리고 말이 없는 아이들로 나뉘었다. 나는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하고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나의 관심사는 운동장에 깔려있는 흙 속에 공룡의 뼈가 얼마나 섞여 있는지였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복도 끝자락에 마련되어 있었던 도서관에만 가면 바짝 마른 수세미가 물을 먹은 것처럼 풀어졌다. 명문여학교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비좁은 도서관이었다. 나무로 된 낡은 문을 열면 높은 철제 책장들이 오른편에 난 좁고 긴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반쯤 차단해 마치 기도실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서관 내부가 나타났다. 다락방같이 어둡고 세로로 좁은 공간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심장이 쿵쿵 뛰는 동시에 차분하고 편안해졌다. 네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들이 모여있는 가판은 가장 먼저 둘러보는 곳이었다. 그곳에 실려 있는 자연과 도시의 사진을 보다보면 전 세계가 나의 무대인 것 같이 마음이 웅장해졌다. 이 칸 저 칸을 둘러보다가 마지막에 손에 잡히는 한 권을 빌려 교실로 간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는 대출을 거듭했지만 결국 읽기에 실패한 책 중에 하나였다.          



Girls be ambitious    



*     


베이비붐 세대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면, 그들을 부모로 둔 우리 세대는 그들이 못 이룬 꿈, 그들보다 ‘성공’하는 것을 사명으로 부여받았다.     


전후 복구기에 태어나 청년 시절에 경제적 호황을 겪은 우리 부모들은 우리가 자신들보다 더 좋은 대학교, 더 좋은 직장에 다닐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의 원조를 할 참이다. 그것이 그들이 겪은 세계였다. 좋은 학벌은 상대적으로 더 넓은 직장 선택의 기회를 의미했다. 좋은 학교만 들어가면 대기업 취직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집안에 태어났어도 스스로 노력하면 자신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노력의 최종목적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더 좋은 학교.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한 부모들은 자식들만큼은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좋은 학교에 들어간 부모들은 그보다 더 좋은 학교에 자식들을 보내기 위해 가진 수단을 총동원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더 나은 인생을 보장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자식들이 자신보다는 나은 삶,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삶, 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이 일상을 버티는 힘이었고, 그 힘은 대한민국의 부동산 시장의 판도를 움직일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      


그 열기는 마주한 사람을 활활 태워버릴 만큼 강렬한 것이었는데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목적과 수단을 구분하는 건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수단은 어느 순간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매해 겨울, 수능시험이 끝나고 나면 결과에 비관한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가 나오곤 했다.     



*     


목표는 철저하게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으로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들은 부차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집에서는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중요시되었던 성역할도 그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집안 그 누구도 나에게 과일 깎기, 청소하기, 설거지하기, 다른 가족원(특히 남자) 보살피고 챙기기, 외모 가꾸기와 같은 ‘여자가 되기 위한’ 행동을 가르치거나 요구한 적이 없었다. 집안일은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하지 않아도 될 일처럼 여겨졌고, 외적인 매력을 가꾸는 일은 똑똑하지 않은 여자애나 하는 천박한 일처럼 취급되었다.      


쟤는 꼭 양공주같네.     


하얗고 긴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내 친구를 처음 본 뒤 이모가 말했다. 집이 가까운데다가 반이 같아 학교에서도 학교 밖에서도 하루종일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였다. 학교를 다닐 때 나는 행동이 조심스럽고 챙겨주는 일에 익숙한 언니 같은 여자아이들을 좋아했다. 그 친구도 그런 타입의 여자아이였다. 양공주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던 그 때에도 이모가 비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약간의 질투심 섞인 비하가 들어있다는 것도.      


엄마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며 ‘애가 좀 늦되었어요’라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사실 그건 걱정이나 근심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에도 그 말 어딘가에 숨어있는 희미한 자부심을 감지할 수 있었다. 늦되었다는 말에는 똑부러지지 않고 생활력이 떨어진다, 다른 또래 여자애들처럼 눈치가 바싹하고 약지 않다는 뜻이 담겨있었는데 엄마뿐 아니라 우리집 여자들(외가식구들)은 나의 이런 성향을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여자들만 있는 집에서 또 다른 까탈스럽고 예민한 여자애보다는 ‘늦된’ 여자애가 환영을 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자신과 비슷해서, 혹은 자신과 달라서 나의 그런 면을 편안하게 여겼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들이 좋아하는 나의 특성을 상황에 대처하는 방패나 무기로 삼았고 종국에 그것들은 정말 ‘나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게 나의 유리천장이 되는 줄도 모르고.     


집안일을 학습한 적이 없으니 가사서비스를 받기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습관은 곧 사고가 되어버렸다. 집에서 나와 따로 살기 전까지는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나의 몫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철저하게 엄마의 영역이었다. 집안일을 할 시간에 엄마가 원하는 대로 공부하거나 공부하는 척을 하는 것이 유리했다. 그편이 더 많은 관심과 인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나는 집안 내 다른 여성을 착취하는 여성으로 자라났다. 


                    

*       


기억 속 엄마는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특히 비가 오기 전에는 언제나 소파에 축 늘어져 정신을 못 차려 했다. 쇼파에 널부러진 엄마 주위에는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환절기에는 알러지성 비염을 끔찍하게 앓았다. 콧물과 눈물로 퉁퉁 부은 엄마는 자기처럼 잔병이 많은 사람은 오래 살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에는 약간의 기대같은 게 느껴져서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엄마는 오래 살고 싶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만성적 피로와 통증, 무기력에 시달리는 평소의 엄마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기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한 체질로 타고난 엄마는 대체로 활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그런 엄마가 열정을 내비치는 분야가 하나 있긴 했는데 바로 나의 교육이었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성적을 관리당했던 건 아니다.(감사하게도) 엄마는 나의 학교 성적을 딱히 묻지도, 문제를 삼지도 않았다. 나는 자연스레 성적에 큰 관심이 없었고, 매번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성적을 얻었다. 다만 영어 교사였고, 퇴직한 지 10년이 된 지금도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와 이상한 의무감을 갖고 있는 엄마는 하루에 꼭 한 시간씩 나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하루에 그 한 시간만 참으면 나머지는 노는 시간이었다. 한약을 먹듯 눈을 꼭 감고 숨을 꾹 참은 뒤 꿀꺽 마셔 버리면 그 다음 날까지는 자유였다.      


골목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한 골목을 공유하는 아이들은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골목에서 땅따먹기를 하고 얼음땡 놀이를 하고 고무줄 놀이를 했다. 눈이 오면 손이 마비될 때까지 바지가 쫄딱 젖는 줄도 모르고 눈 위에서 뒹굴었다. 나는 여전히 엄마가 나의 어린 시절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 준 사실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은 또 다른 전형적인 베이비붐 세대의 워킹맘이었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조그맣던 선생님은 자신의 체격을 커버하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미스코리아처럼 앞머리를 거대하게 부풀리고 빛이 바랜 하와이안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 과장된 앞머리와 옷차림, 그리고 빠른 말투와 높은 목소리 때문에 선생님은 화려한 깃털을 가진 왕관 앵무새 같아 보였다.     


말도 발걸음도 어찌나 잰지 언제나 급한 일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예의 그 빠른 말투로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학생은 공부해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선생님이 종종 본인의 딸에 대해 얘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딸이 우리와 동갑이고 공부를 무척 잘하며 과학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조금의 망설임이나 우물쩍 거리는 기세 없이 잰걸음으로 학교를 빠져 나갔는데 입시 중이던 본인의 딸을 챙겨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급한 일이 있던 셈이다. 선생님은 본인이 성적 지상주의자임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성적순으로 아이들의 자리를 배치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나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큰 반감을 사지 않았는데, 나는 그 이유가 선생님의 공부타령이 특정 아이들에 대한 편애로 이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인사 잘 해야지’ ‘친구들끼리 사이 좋게 놀아야지’ 같은 습관적 도덕률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선생님이 예뻐한 아이는 소위 말하는 날라리 여자애였는데, 까무잡잡한 조막만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아이였다. 키가 크고 삐쩍 말라 모델 같은 애였는데 성격이 털털해 선생님의 말을 받아치곤 했다ᆞ. 선생님이 그 아이를 귀여워하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마는 어느 날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선생님은 내가 이대로라면 ‘인 서울(In-Seoul)’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적어도 ‘인 서울’은 가능하지 않겠나 막연히 생각했던 엄마는 충격을 받은 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본인의 딸이 다니던 입시학원을 추천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입시제도에 편입하게 되었다. 어떤 학원은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봐야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실컷 놀았던 탓인지 학원에서 공부하는 다른 아이들을 보는 일이 자극이 되었고 처음으로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학원을 통해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한민국 교육현실의 아이러니다) 공부가 재밌어지자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이후부터 엄마는 맹모삼천지교는 아니어도 명의를 찾아다니듯 실력 있다는 학원을 지역에 가리지 않고 찾아내며 나를 등록시켰다. ‘무심하고 천진한’ 내가 ‘인 서울’할 수 있었던 것에는 왕관 앵무새 선생님의 조언과 엄마의 적극적인 행동이 있었다. 



*    

 

전통적으로 다른 가족 구성원을 뒷바라지하는 일은 여성의 역할이었다. 저임금노동력으로 산업화의 전선에 뛰어들 것을 요구받았던 시대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성들에게 부여된 ‘뒷바라지 역할’에는 변함이 없었다. (남)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정작 본인의 교육은 포기한 채 공장에서, 다른 가정에서 일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성공 신화의 뒷면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외할머니는 본인의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동생 한 명, 여동생 한 명을 데리고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왔다. 그렇게 하기까지 어린 할머니의 투쟁이 있었다고 들었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두 동생의 학비를 댔다. 그 결과 황해도에서 내려온 세 남매는 나란히 교사가 되었다. 엄마와 이모는 아직도 할머니가 그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본인의 학비와 생활비에 두 동생들의 비용까지 댈 수 있었는지 경외심과 안타까움을 섞어 감탄하곤 한다. 할머니는 동생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어려운 친인척을 두루두루 챙겼다고 하는데 말년에는 엄마와 이 문제로 갈등이 생길 정도였다. 할머니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동생들을 데리고 상경할 생각이나 했을까. 그 시절 집안에서 남자를 홀로 유학보냈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보살펴야 할 누군가를 함께 딸려 보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교육의 기회는 세대를 내려갈수록 확대되어 엄마는 교육받기 위해 할머니처럼 자신의 인생을 걸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엄마의 엄마는 1940년대에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나 서울에 유학 온 전력이 있는 사람 아닌가. 대신 엄마는 할머니의 높은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할머니가 바깥에서 일하고 엄마가 공부하는 동안 집안 살림은 집에서 같이 사는 식모에게 맡겨졌다. 인건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집안일을 전담하는 식모가 상주하고 있었으니 할머니, 엄마, 이모 집안의 그 누구도 집안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왜 집안 살림 교육을 시키지 않았는지 이해가 될 법도 한 일이다.   

   

할머니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엄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할머니와 같이 ‘일하는 여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낳고 상실되었던 자신감을 많이 회복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한 명의 인간을 낳고 양육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자기 효능감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나름대로 자식 교육에서 성공을 맛보며 엄마는 점점 무적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가 엄마가 될 무렵 도시화와 핵가족화는 상당 부분 진전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내조의 대상이 축소되었음을 의미하게도 했다. 이제는 남편과 자식만 내조하면 되었다. 내조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해냈는지는 남편의 임금과 직장, 자녀들의 성적과 다니는 학교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대한민국 베이붐세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가족 모임에서든 엄마들 모임에서든 공부를 잘하는 자녀를 둔 여성들은 무언의 권위를 행사했다. 자녀가 전교 1등이라는 사실은 많은 말을 대체하고 그 자체로 정당한 핑계나 변명이 될 수 있었다. 며느리들은 자녀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면서 비로소 시민권을 얻었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는 당시의 선전 구호처럼 이제 더 이상 딸은 ‘출가외인’이나 ‘집안 살림을 거드는 일꾼’이 아닌 엄마의 못 이룬 꿈을 실현하여 부모에게, 특히 엄마에게 대리만족을 가져다 줄 희망처럼 여겨졌다. 그 방법은 간단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 엄마와 딸의 관계는 피와 아를 구분할 수 없이 뒤엉켜 버렸다.


엄마는 본인 스스로가 임금노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여느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집안일과 자녀의 교육에 관한 일을 혼자 짊어졌다. 퇴직한 뒤 소회를 묻는 질문에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 같다던 엄마의 대답은 그간의 삶이 얼마나 의무에 짓눌려왔는지를 짐작케 했다. 그렇지만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모든 것을 본인이 감당하는 대가로 대체 불가능한 효능감과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엄마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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