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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에최 Oct 26. 2023

[봉평집기록] 봉평집의 호스트

공간을, 경험을 나누고 싶은 마음


버려진 것 같은 공간이 온기를 품게 되면서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 에어비앤비를 운영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실제로 단지 내 오너들 중에는 많지는 않지만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고 얘기를 들었던 터였다. 와, 입구에 하트로 꾸며진 포토존을 만들어 놓은 이런 낡은 단지에 손님이 온다고? 아닌 게 아니라 에어비앤비는 아니지만 관리자를 두고 숙박업소처럼 운영하는 오너들은 꽤 많았고 연휴철이 되면 한산한 단지에 차들이 꽉 들어찼다. 흠.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군.   

  

자꾸 봐야 예쁘고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고 했던 시인의 말처럼 봉평집과 봉평이 그렇게 되었다. 이 공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 봉평집에서 머문다고 하면, 특히 아이를 동반한 사람이라면, 동네 맛집이나 아이와 같이 할 만한 거리들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추천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 한켠엔 봉평집 관리비라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도 있었다. 개인적인 욕심을 얹어 호스트가 적성에 맞는지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전업 호스트의 삶은 어떨까. 잠시 나의 에어비앤비 경험을 떠올려 본다. 처음 에어비앤비 이용해본 것은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망똥(Menton)에서였다. 프랑스 도시의 전형적인 집처럼 연식이 족히 백년은 되어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의 가장 꼭대기층의 한 편을 차지하는 작은 공간이었다. 팬시하지는 않지만 정겨운 가구에 살림살이가 모두 구비되어 있어 우리는 망똥에 머무는 동안 장을 봐서 요리를 자주 해먹었다. 작은 야외 테라스가 여행의 설렘을 돋구었고 창고에는 파라솔이나 튜브와 같은 물놀이를 위한 장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이탈리아 접경지대라 그런지 구사하는 영어에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 억양이 진하게 묻어 있던 호스트는 근처에 맛있는 피자가게를 추천해 주었다.


첫 에어비앤비의 경험이 무척 신선하고 편안했기에 국내 여행에서도 이용해볼까 검색해보았지만 한국에서의 에어비앤비는 타인의 공간에 머무르며 그들의 취향과 일상을 느껴볼 수 있는 체험, 그러니까 에어비앤비가 의도했던 내가 없는 동안 나의 공간을 타인에게 잠시 빌려준다는 공유숙박이라기보다는 '집 처럼 꾸며놓은 숙박업체'의 느낌이 강했다. 좀 아쉬웠다.


봉평집을 에어비앤비로 운영한다면 손님들만이 이용하는 숙박업소가 아닌 실제 호스트가 머무는 집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이름은 봉평집이라고 해야지. 봉평집에는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일상의 물품들, 렌즈세척액부터 시작해서 아기기저귀와 장난감까지 상비되어 있을 예정이었다. 일상과 취향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컨셉은 가슴 떨리게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두려움도 가져왔다. 게스트들은 일상의 시시콜콜함을 어느 선까지 이해해줄까, 우리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공간이 혹시 망가지지는 않을까.


그렇지만 남편의 디자인 감각과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의 스타일을 합치면 꽤 만족스러운 공간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소에 큰 취미는 없지만 일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지.


봉평이 엄청난 관광지는 아니지만 스키장이 근처에 있으니 겨울이면 어떻게든 수요가 생길 것 같은데.. 이 동네엔 디자인적으로 신경을 쓴 숙박공간을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나름대로 승산이 있지 않을까? 찾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저 앞으로 멀리 달려 나갔다. 어쩌면 오래된 퇴사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잠깐이나마 가슴이 쿵쾅거렸다.     


앞으로 달려 나간 생각을 붙잡아 눈 앞의 땅 위에 올려놓으니 안 될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칠이 벗겨진 세면대를 바꾸고 도배를 다시 하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호스트로의 자존심 문제였다. 그렇지만 당장 예산이 없는데? 이게 벼락 맞은 것처럼 세컨드하우스가 생겨버린 우리의 문제였다. 공간은 있지만 돈은 없는 것. 대출을 받아 투자하기에는 단지 전체가 공동화될 리스크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워낙 오래된 단지라 단지 내의 소유와 운영구조가 복잡하다) 단지 내에 아무리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고 해도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거나 전기가 끊겨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정적으로 서울집과의 거리가 문제가 되었다. 지역주민을 관리자로 고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일단 인구가 적은 그 지역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또 다른 일이었고, 일당을 지불하고 나면 의미 있는 수익이 날 것 같지도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주인이 직접 관리하지 않는 숙박공간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을 수 있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 터라 일단 생각을 접기로 했다. 배보다 배꼽이 크면 안되는 법이니까.     


에어비앤비의 호스트가 되는 걸 포기하는 대신 나는 봉평집에 가족과 지인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눈에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도 봉평집의 사랑스러움을 공유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고 컴플레인을 받을까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다. 단골식당에 자신있게 데려가고 일정 제안도 척척할 수 있으니 호스트로서 자기효능감이 올라갔다.      


봉평집을 엄마, 이모, 동생과 나누었다.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만나 인연이 된 친구와 친구의 아이도 여러 차례 왔다 갔다. 친한 친구 부부와는 이곳에서 여름휴가와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보냈다. 지난 겨울 카타르 월드컵에서 포르투칼을 상대로 한 역전의 축구경기도 봉평집에서 보았다. 처음으로 주최자가 되어 20년만의 친정식구 여행을 감행한 것도 봉평집 덕이었다. 아이는 산타의 첫 크리스마스 선물을 봉평집에서 받았다. 의미있는 사람들과 봉평집을 나눌수록 우리에게 봉평집의 의미도 더 커졌다. 친밀한 사람들과의 경험과 기억이 쌓여서인지 아이도 언제 봉평집에 누구랑 갔었지, 저번에는 누구랑 왔었지, 하고 봉평집에서의 지난 시간을 추억한다.     


봉평집에 갈 수 있는 때는 보통 주말이라 봉평에서의 온전한 하루가 주어지는 건 토요일 하루 뿐일 때가 많다. 금요일 밤에 도착하고 일요일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 자연스레 루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겼다.


계절마다 루틴은 조금씩 달라지는데 일주일이 멀다 하고 봉평집에 들락거리던 여름에는 봉평집에 있는 토요일마다 강릉으로 나들이를 갔다. 여름 바다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이라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을 더 달려 강릉의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곤 했다. 강릉의 바다는 수심이 급격하게 깊어져 물놀이할 때 긴장을 많이 하게 되지만 서해와 남해와는 다른 거칠고도 호쾌한 매력에 빠지면 묘약이 없다. 어쩌다 멀리 가지 못한 조개라도 건져 올리면 아이 앞에서 어깨가 한 뼘 올라간다. 이거 봐, 엄마가 잡은 조개다! 조개 껍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개야. 봉평집에서 강릉을 가는 고속도로는 서울과 봉평을 오가는 고속도로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여행의 액자식 구성이랄까. 여행 속의 여행. 설렘에 설렘을 더하면 트렁크는 아이의 모래놀이 용품과 튜브, 돗자리, 캠핑의자, 말라비틀어진 옷가지와 타올, 이 모든 것에 섞여 들어온 모래로 뒤엉켜 엉망이 되어버린다. 그건 우리가 찬란한 여름을 낭비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놀았다는 증거이므로 그대로 나의 자랑이 된다.      

모래놀이, 물놀이 빠짐없이 즐거운 여름바다

   

겨울철에는 절이 있는 산에 간다. 봉평집에서 50분 정도를 가면 아이와 걷기 좋은 오대산이 나온다. 고려 시대에 지어진 팔각구층석탑으로 유명한 월정사도 그곳에 있다. 여름에는 전나무길 곳곳에 출몰하는 다람쥐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지만 소란이 사라진 고즈넉한 정취는 최고다. 바깥에 눈이 쌓이든 말든 매서운 바람이 불든 말든 따뜻한 집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미뤄놓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몇 편씩 이어보기에 좋은 계절이지만 나날이 샘솟는 어린이의 에너지 발달단계에 맞추어 액티비티 일정을 곳곳에 끼워 넣어줘야 한다. 이럴 때엔 휘닉스파크를 십분 활용한다. 스키장에서 평소 봉평에서 보기 드문 인파를 구경하고 눈썰매를 즐겨본다. 그러다 손과 발과 얼굴이 얼얼해질 때 즈음 케이블카를 타고 스키장 정상까지 올라가 인공눈이긴 하지만 사방에서 사정없이 날아드는 눈보라를 맞는 것도 한번쯤 해볼 만하다. 휘닉스파크에서 운영하는 워터파크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사실 워터파크는 질색이지만 이제는 나만의 취향으로 여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올 겨울엔 지나가다가 눈여겨본 휘닉스파크 찜질방도 이용해볼 셈이다.     

코가 뻥 뚫리는 겨울의 오대산


그 사이의 계절들은 그 자체로도 황홀하니 무엇을 해도, 어딜 가도 좋다. 여름철에 강릉을 드나들며 소홀해진 봉평으로 다시 관심을 돌려보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지난 주말, 아이와 단둘이 봉평집으로 향했다. 둘이서 봉평에 간 것은 지난 겨울 고장 난 보일러를 확인하고 수리하러 내려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주말에도 일정이 많은 남편 스케줄 때문에 봉평에 더 자주 가고 싶어도 아이와 단둘이는 자신이 없어 쉽게 시도를 못했었다. 강원도 단풍이 절정이라는 뉴스를 보고서는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싫다고 하면 그 핑계로 마음을 접을 셈이었다. 아이는 아주 흔쾌히 그래! 라고 답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없어 재차 물었지만 아이가 둘이라도 상관없다고 재차 답하는 바람에 그 대답을 방패삼아 용기를 낸 것이다.


아이가 혼자 카시트에 앉아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차 안에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봉평에 도착한 이후에는 장거리를 최소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평창에만 머물기로 한다. 파워P성향이지만 아이와 함께 하니 P에 눌려있던 내 안의 작은 j를 모두 소환해 개략적인 일정을 짰다. 평창에는 동물먹이체험을 할 수 있는 켄싱턴호텔이 있고, 오대산이 있다. 그리고 서울에 다시 돌아오는 일요일엔, 봉평오일장을 가기로 한다. 2와 7로 끝나는 일자에만 열리는 오일장인데 마침 일요일이 22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봉평집이 생긴지 1년만에 처음으로 봉평오일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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