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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정 Dec 29. 2022

형사와 범인의 동거생활

정리정돈 하며 살기

 우리 집에 범인이 있다. 범인은 항상 남자 셋이다. 그들은 모두 김 씨 성이고, 혈액형은 A형이다. 개띠의 띠동갑으로 그들은 36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연대감과 함께 외모와 성향도 비슷하다. 치밀하지 못해 어떻게든 흔적을 남겨 현행범으로 잡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집에는 형사도 같이 산다. 높은 검거율을 자랑하며, 서 씨 성을 가진 유일한 여성으로 O형의 토끼띠다.


 범인과 형사의 동거는 평화로울 수 없다. 잡고 잡히는 쳇바퀴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어리숙한 범인들은 완전 범죄를 못하면서 재범을 저지르기 일쑤다. 어린 범인들은 과자를 먹고 나서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방치한다. 어쩌다 잘 버린다 해도 분리수거를 제대로 못 해 수사망에 걸려든다. 약을 사용하면 제자리에 두어야 하는데 면봉과 약을 탁자 위에 그대로 둔다. 샤워 후 욕실은 엉망이다. 수건은 제멋대로 널려있고 슬리퍼는 짝짝이로 뒤집혀있다. 머리카락도 욕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범인으로 지목되기 전에 얼른 정리를 해야 하는데 현장에 들이닥친 그녀에게 여지없이 추궁을 당한다.


 나이 먹은 범인도 예외는 아니다. 살아온 시간이 많아 어린 범인보다 눈치껏 한다고 하지만 도긴개긴이다.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을 뿐, 그것으로 위기 모면은 어림도 없다. 그녀는 물건의 위치와 놓인 시간, 날짜를 기억하고 있고 조금만 물건이 잘못 놓여도 족집게처럼 잡아내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딱 걸렸어’라는 말과 함께 노출된 증거와 추리력에 순순히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빨리 죄를 인정하는 것이 평화를 가져다줄 뿐이다.


 사춘기 나이의 어린 범인들은 곧잘 자신의 범죄 사실을 부인한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민다. 제일 어린 범인은 반항기가 많다.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고 자신이 아니라고 끝까지 우긴다. 형사의 추리력과 범인의 알리바이는 공존할 수 없다.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은 형사의 논리적 추론과 커지는 목소리 앞에 사그라질 뿐이다. 어린 범인이 불쌍해 아빠가 나서지만, 괜히 나섰다가 과거의 죄목과 함께 공격의 대상으로 바뀐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공통된 이유는 급한 성격과 대충 하는 성향 때문이다. 타고난 급한 성격은 정돈된 상태의 물건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급하게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바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나이 든 범인은 달걀 요리를 하려고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냈다. 프라이팬에 요리가 되어가고 있어 급하게 눈에 보인대로 대충 꺼내 사용했다. 날짜별로 정리해 놓은 달걀 트레이에서 위의 것부터 순서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본 형사는 바로 범인 검거에 나섰다. 아래 트레이의 달걀 세 개만 빠져 있으니 범죄 현장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범인 검거는 쉽고 단순했다.


 부엌의 식기와 세면대의 수건, 냉장고의 음식 보관 등 집안의 모든 물건은 놓는 위치와 순서가 있다. 그 원리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남자 셋은 범죄 현장에 증거를 남긴다. 음식과 약은 날짜별로, 유통기한 순서대로 보관되어 있고, 수건은 접힌 부분을 밖으로 해서 욕실 사물함에 놓여 있다. 커피포트를 사용할 때는 뜨거운 수증기가 부엌의 TV 스크린 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놓는다. 수증기로 인해 스크린이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물을 끓일 때 커피포트 방향을 신경 써야 한다.


 당연하면서 간단한 원리를 숙지해서 사용하면 되는데 범인들은 이해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대충 놓인 물건을 사용하려는 성향 때문이고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충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무관심은 범죄를 반복하게 한다. 형사는 지쳐갔다. 여러 차례 계도 기간을 주었지만 타고난 범인들의 성향으로 범죄율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몇 달 전 범인과 형사는 새집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각 방, 거실, 욕실, 냉장고, 세탁기, 식기 세트, 공구함, 약상자, 가전제품 사용설명서 등 각종 집안 물건을 정리 정돈했다. 그녀의 손이 닿은 정리 정돈은 예술에 가깝다.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고 보기 좋은 부분을 강조한 사물의 배열에는 미적 감각이 살아있다. 그녀는 마트에서 각종 정리함 박스를 사서 집안의 각 물건을 크기에 맞춰 이렇게 넣고 저렇게 넣으며 정리 정돈을 했다. 그것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인간의 삶이 작동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 질서가 만들어진 것처럼 그녀는 사람과 물건 사이의 질서를 만들었다. 깨끗하고 정리 정돈된 유토피아를 꿈꾸며 창조주 못지않게 자신만의 세상을 디자인했다. 새집으로 이사한 후 이전의 질서보다 더 강화된 질서가 세워졌다. 사람만 빼고 모든 것을 새것으로 교체했기에 정돈된 단순함과 배치의 미적 감각까지 추구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형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교수이고 아내이며 엄마이고 주부였다. 이사 오면서 점차 형사가 되어 간 것이다. 그녀를 형사로 만든 것은 남자 셋이다.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남성은 사냥과 수렵 생활로 이어진 유전자를 가졌기에 도통 집안의 물건을 정리 정돈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진화론을 들추며 형사에게 선처를 부탁해도 그녀는 촉각만 곤두세울 뿐이다.


 질서를 창조한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순서대로 사용하고 제자리에 갖다 놓아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면 되는데, 그것을 못 하는 그들이 답답한 것이다. 그녀의 답답함은 범인들의 잘못도 있지만, 나이를 먹어 가며 쌓여가는 스트레스로 인해 약해진 건강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많이 있었지만, 형사처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의 준비와 논문심사·학생모집, 동영상 강의 제작 등 늘어난 학교 일과 해도 표가 나지 않는 가사 노동, 그리고 두 명의 고등학생 아들 공부까지 챙기다 보니 신경 써야 할 범위가 나이만큼 늘어갔다.


 그녀는 어느덧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여성으로 겪는 신체적인 변화와 약해진 건강은 주말이면 침대와 한 몸을 이룬다. 올해 유난히 날씨가 좋았지만, 주말이나 방학 기간에 밖으로 놀러 다닌 적이 없다. 온종일 피곤해하며 시간만 나면 잠을 잤다. 정신력으로 이끌었던 육체는 지친 정신력을 끌고 침대로 간다. 잠은 그녀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고 나름의 건강 비법이다.


 그녀가 더 이상 형사 노릇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건강상 또 하나의 역할을 추가로 수행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범인 셋이 회개하고 그녀가 만든 질서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다. 원죄를 지고 있는 나이 든 범인이 가장 미안해하고 있어 해결될 가능성은 크다. 그녀 스스로 건강을 회복하고 활력 넘치는 생활을 만들어가며 일상의 기쁨과 감사를 느끼고 살았으면 한다.


 범인들 모두 형사와의 공존을 위해 그녀의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내년 계묘년은 검은 토끼의 해로 그녀의 해이다. 만물의 생장, 번창, 풍요를 상징하는 토끼의 활기찬 모습으로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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