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시간, 모두에게 평등하기를
불 꺼진 거리를 LED 조명 간판이 지킨다. 은행, 상가, 공공기관, 아파트의 외벽과 정문에도 간판 조명이 야간 근무를 하고 있다. 밤이 되어 인적이 드물지만 도시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푸른빛의 조명이 오히려 상호를 더욱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른 아침, 밝은 기운이 사람을 모았고, 모아 온 사람이 활기를 몰아 사람들을 분주하게 했다. 물건을 사고팔고, 서비스를 주고받고, 노동하며 움직였던 공간은 사람으로 가득했지만 밝음이 줄어들면 사람도 줄어든다. 사람의 빈 곳을 간판의 조명이 빛을 밝히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을 닫으면서 혹시 늦은 밤 찾아오는 사람에게 내일 다시 오라고, 여기 우리 사무실, 학원, 약국, 기관이 있다고 알리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먹고사는 삶은 하루를 끝내지 못한다. 하루는 밤과 낮의 시간일 뿐 생계의 시간은 아니다. 하루 일을 끝내고 쉰다는 것이 일상의 평범함이 아님을 야경의 건물, 사무실, 상점 등에서 보게 된다.
25년 전, 강원도 소도시로 발령받은 친구가 놀러 오라고 했다. 9시가 넘으면 동네 전체가 불이 꺼져 할 일이 없다고 했다. 9시면 서울은 초저녁이나 다름없는데 뭐 그런 데가 다 있냐며 믿지 못하는 반응을 보였었다. 친구와 같이 여름휴가 때 그 도시로 놀러 갔었다. 말 그대로 9시가 되니 모든 불이 꺼졌다. 친구네 아파트 가로등을 등지고 불 꺼진 암흑 속에서 새까만 세상을 보았다. 아무 불빛도 없는 태곳적 시대의 모습이 그려졌다.
8년 전,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으로 서울 본사가 지방 중소도시로 옮겨갔다. 그곳도 9시가 되면 식당 문을 닫았다. 9시면 한창인 시간을 이곳 사람들은 문 닫을 시간이라 하며 나가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무른 익은 시간을 중간에 끊고 헤어지는 것이 어색했고 아쉬웠다. ‘9시에 문을 닫아도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나’라며 속으로 비꼬기도 했다. 지방의 중소도시가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리 없겠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살아왔던 이들의 생활이 부러웠다.
인간의 일과가 자연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은 농경 사회 때까지인 것 같다. 농경시대의 노동시간은 낮과 밤, 사계절 자연의 시간에 따라 함께 움직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토지에서 벗어난 인간의 노동력이 자본가에게 귀속되면서 노동시간은 인위적으로 늘어났다.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노동시간에 대한 오랜 갈등은 결국 국가가 나서서 52시간 근로시간을 법으로 정하면서 정리되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한 것이다.
새해 ‘모두가 가난해진다.’라는 KBS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 노상에서 꼬박 밤을 새워 명품 핸드백 오픈런 알바를 한 젊은이, 집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나 주말부부 하며 하루 10시간 이상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20년 넘게 일했지만, 회사의 파산으로 퇴직금을 받지 못한 중소기업 근로자, 주식투자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퇴근 후 투잡으로 붕어빵 장사를 하는 사람. 경제 위기가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겪고 있는 서민의 삶이었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추운 겨울 노상에서 자신의 몸과 시간을 온전히 내어놓았고, 8시간 근무만으로 생계가 어렵기에 자처해서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고, 힘든 직장 일을 마치고 다시 새벽까지 붕어빵을 팔며 자신의 온몸을 갈아 넣고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존심은 벗어버렸다. 삶을 이어가기 위해 온몸으로 맞서는 모습에서 뭉클함과 함께 경건함 마저 느껴졌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가 끝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이 위기를 잘 극복하면 전처럼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코로나는 허약한 글로벌 공급망 체계를 보여주었다. 값싼 제품이라 해도 제때 수입을 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가격이 급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코로나를 겪으며 각국은 자국 중심의 산업과 보호무역으로 선회하였고, 세계화는 지난날 추억거리가 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2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곡물 가격을 상승케 하여 공공요금, 생필품, 외식비 등 모든 물가를 오르게 했다. 미국은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였고, 우리도 외국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하였다. 지난해 우리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와 연준위 기준금리 인상에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미국이 재채기하면 한국은 폐렴에 걸린다는 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금리 인상은 2∼3년 전 벼락 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저금리 기조에 맞춰 투자했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집을 살 수 없다는 계산은 20∼30대 젊은이들로 하여금 영끌로 집을 사게 했고, 가상화폐, 주식투자 등 자산 시장에 투자 붐을 일으켰다. 파티가 끝난 것처럼 금리 인상은 가처분 소득의 감소를 가져왔고 인플레이션은 실질 소득을 감소하게 했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전세가 하락, 거래량 급감으로 폭락이 예상되고 무역수지 적자는 1년째 이어져 경제 주체 모두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오고 있다.
인간이 노동에서 벗어나 살 수 있던 시대가 있었을까? 아담이 선악과나무를 따 먹은 후 하느님께서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라고 했다. 평생 노동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는 형벌인데, 노동 없이,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권리가 박탈된 것이 아쉽고 원망스럽기까지 한다.
원시 수렵시대부터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화 혁명, 4차 산업혁명 등 인류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쉽고 편하게 먹고살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그 결과 엄청난 부와 풍요로움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아담의 노동은 벗어나지 못했다. 자산시장의 거품은 상대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렸지만, 다큐멘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일을 해야 생계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도심의 모든 불이 꺼지고 암흑 속에서 태초의 원시적인 모습으로 산다면 우린 다 같이 일과를 마치고 함께 쉴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해본다. 9시면 불이 꺼지고 가게 문을 닫는 것이 신기해서 발전이 덜 된 것처럼 여겼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에게 저녁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했다.
여전히 불을 끄지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하는 늦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