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효상의 '묵상'을 읽고
수도원으로 피정을 하러 갔다. 5월을 맞는 첫날은 날씨가 쌀쌀했다. 계절의 여왕이 되기 위해 5월은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흐린 하늘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녹음에 가려진 수도원 건물은 고요했다. 인적이 없는 수도원 입구는 여느 수도원과 같이 성구와 초 봉헌, 성물들이 차려져 있었다. 전화로 도착했음을 알리자 신부님이 나와서 수도원, 생활관, 성당, 도서관 등을 안내했다. 오늘 피정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몇 년 전부터 혼자 피정을 했다. 어릴 적 복사를 해서 그런지 성당에 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젊은 시절 힘들고 지칠 때 하소연하거나 풀리지 않는 물음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성당을 찾았다. 십자가를 보거나 빨간 불빛의 감실을 멍하니 보며 기도를 했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나 일이 쉽게 풀렸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체험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번 피정은 신앙에 대한 회의감으로, 하느님과 멀어지는 자신을 보며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답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하느님의 응답을 들은 적은 없다. 피정 후에 오는 마음의 편안함이라도 얻기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인생의 가장 큰 위기를 겪으면서 내가 믿고 의지했던 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고 기도를 했었지만 나를 빼고 세상이 돌아가듯 무심히 시간만 흘렀고 침묵만 있었다. 최근에는 내 믿음이 잘못되었는지,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신을 인간이 만들고 경배하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승효상의 ‘묵상’을 읽었다. 건축가인 승효상 작가가 동숭학당 사람들과 같이 유럽의 수도원을 답사하면서 쓴 기행문이다. 건축가로서 전 세계의 건축물을 보고 모티브로 삼으며 많은 곳을 다녔지만, 작가는 책의 후문에 수도원과 묘지를 습관적으로 찾는다고 했다. 둘 다 세상을 등진 이들을 위한 시설이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있어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고요하고 외로운 곳을 굳이 찾아가는 것이 의아해했지만 삶의 근본을 찾아가려는 모습에 깊이가 있어 보였다.
작가의 이러한 성향이 내적 충만과 영적 성숙을 위해 주위의 사람들과 이런 여행을 준비하게 한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기에 사전에 필요한 지식을 공부하고 꼼꼼히 공유하는 모습이 색달랐다. 여행은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쉬고, 먹고, 즐기는 것도 있지만,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도 의미 있어 보였다.
책은 수도원 건물을 주로 이야기한다. 수도원은 진리를 찾고자 스스로를 추방하며 경계 밖 극한의 현장에서 삶을 산 이들의 터전이다. 건축가로서 그는 수도원 건물이 주는 역사적, 인문학적, 건축학적 의미를 소개하는데 그 지식과 통찰이 상당했다.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성무일도, 고해성사가 도입된 배경 등을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처음 방문한 수도원은 수비아코의 베네딕토 수도원이다. 사람이 닿지 못할 수직 같은 벼랑에 수도원이 있다. 굳이 저런 곳에 수도원 건물을 지었는지 의아해했다. 작가는 자신을 기다리는 신을 찾아 끝까지 간 흔적이며, 세상과 완전히 결별한 삶을 살고자 한 절박함이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치며 고독한 삶을 스스로 짊어지고 사는 수도자의 삶에 무슨 낙이 있고 기쁨이 있을지 궁금했다. 조그마한 방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주일학교 교사를 했을 때였다. 담당 수녀님이 본당 사목을 마치고 본원 수녀원으로 돌아가셔서 인사차 수녀원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수녀원에서 식사도 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수녀원의 일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기도로 시작해 독서, 노동, 기도로 마무리하는 단순하고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매일 같은 일상이 지겹지 않냐고 한 후배가 질문했다. 그때 수녀님은 단순하고 단조롭지만, 그 안에서 자유롭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험하지 못한 삶이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수도자가 살아가는 삶을 조금은 안 것 같았다.
폐허가 된 로마 황제의 한때 도시, 빌라 아드리아나를 보고 작가는 건축과 도시는 사라지는 숙명을 피할 길이 없다고 했다. 망하고 폐허가 되는 역사의 불가항력의 과정에 순종해야 함을 말한다. 유한한 인류가 만든 도시와 건물도 인간처럼 유한하기에 폐허가 되는 것은 당연한데, 그런 과정을 ‘순종’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의미가 있다.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순종’할 수밖에 없고 역사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건축은 단순히 인간의 삶에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이상임을 알게 되었다. 건축가의 의도와 사상이 반영된 건물은 공간을 넘어 영감을 주고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를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르코르뷔지에가 건축한 수도원과 성당의 사진을 보면 투박하지만 검소한 석재에 자연의 채광이 고즈넉해 수도자나 신자들로 하여금 저절로 성찰하고 기도하게끔 할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하는 피정은 쉽지 않았다. 성당에 앉아 침묵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지만 내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지금, 이 고통스러운 상황의 의미는 무엇인지? 주님이 함께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주님이 내게 멀어진 것인지, 내가 주님에게서 멀어진 것인지 등 여러 의문이 맴돌았다. 성당도 나도 조용할 뿐이다.
인간이 절대자인 하느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다. 수도자들은 경계 밖에서 그 뜻을 찾으려고 몸과 마음을 다해 평생을 살았다. 인생의 순례자로서 나 역시 수도원을 찾았다. 인간적인 나의 믿음이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만, 평생 주님의 뜻을 좇으려는 수도자들처럼 나 역시 그런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