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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정 Jun 19. 2024

일상으로 돌아갈 힘

 홍도를 다녀와서

 승효상의 ’ 묵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에서 ‘여행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힘을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그 힘은 진실로부터 나오며, 진실은 늘 현장에 있다고 했다. 현장이 주는 진실의 힘을 통해 우리는 일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행은 혼자서 가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스스로 추방당한 자가 되어 모든 것을 객관화할 수 있어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혼자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여행지마다 다들 무리 지어 재미있게 노는데, 혼자만 뻘쭘하게 있는 모습이 어색하고 청승맞아 보일 것 같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거기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떠올라 슬그머니 주저앉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혼자 여행을 가야 할 이유를 알았다. 거창하게 현장이 가지는 진실의 힘은 아니더라도 메마른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스스로 추방당하고 고립된 곳을 찾아보니 섬 만한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남도의 끝자락의 섬, 홍도였다.     



  

 배는 만석이었다. 유람선을 타봤지만, 좌석표가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배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갇혀서 꼼짝없이 2시간 30분을 가는 것이 곤혹스럽게 느껴졌다. 다행히 홍도로 가는 뱃길에는 큰 파도가 없었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모를 멀미를 대비해 약도 먹었겠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안도감과 아침부터 초행길이라 서둘렀던 긴장감이 풀려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홍도에 도착한 배는 채웠던 사람들을 뱉어냈다.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려는 듯 사람들은 서둘러 출구로 향했다. 섬에 내리자 바닷가의 끈적끈적함과 비린내가 어우러진 바다의 냄새가 몸을 감쌌다. 섬의 부두는 작았다. 뒤편으로 오래된 모텔과 식당 건물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건물도 사람도 섬처럼 늙어 보였다. 허기진 배를 채우러 식당으로 향했다. 예상은 했지만, 관광지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는 것은 역시 어려웠다. 가는 식당마다 혼자라는 말에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두어 곳의 식당에서 퇴짜를 받자 종전에 호객행위를 하던 아줌마가 떠올랐다. 유람선 매표소 앞에서 표를 끊으러 온 이방인들에게 궁금한 것을 알려주며 자신의 전복 라면을 홍보했던 분이다. 밥을 먹기는 글러서 라면이라도 때울 양으로 그 아줌마가 알려준 식당으로 향했다. 작은 섬에서 종전의 그 아줌마를 다시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라면을 먹으러 가겠다고 하니 같이 가자 한다.     


 부두 끝에 해녀 포차 촌이라는 표시판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돌자 몽골 텐트와 같이 생긴 10여 개의 포차가 늘어섰다. 홍도에도 해녀가 있는 줄 몰랐다. 나를 안내해 준 아줌마는 자신도 해녀라고 했다. 해녀라는 말에 거친 바다에 오직 자신의 몸 하나에 의지에 해산물을 캐며 살아낸 고달픈 삶이 떠올랐다.     


 배도 고파 라면과 함께 횟감도 한 접시 시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 홍도는 양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해녀는 혼자 1차, 2차, 3차 산업을 하고 있다. 해녀가 갖다 준, 아니 잡아다 준 횟감을 먹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에서 꺼내온 해삼과 소라를 입안에 머금고 천천히 바다를 씹어보았다. 비린내가 나지만 천천히 씹히는 오독 도독한 식감은 입안에서 목구멍으로 헤엄치듯 넘어갔다. 허기진 배는 바다가 준 자연산 횟감으로 채웠고, 인간이 만든 라면 국물은 차가운 뱃속을 덥혔다. 지금 내 배는 바다의 잔잔한 물결처럼 평화롭다.

    

 허기를 채우고 나서 유람선 타기까지 40분 정도 여유가 생겼다. 동백숲 길을 갔다 오면 배 시간과 맞을 것이라고 해녀 아줌마가 알려주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낡은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 이윽고 드러난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나무들이 기괴하게 엉켜있었다. 이렇게도 나무가 자라나 싶을 정도로 줄기와 가지가 옆으로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온통 미지의 나무와 풀로 가득 차 보였다. 원시림을 보는 것 같았고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람선을 탔다. 바다에서 홍도를 봐야 홍도의 절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롱베이 못지않은 광경에 ‘와’라는 탄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사암과 규암으로 이루어진 홍갈색의 바위를 보자 왜 홍도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홍갈 색 바위 위에 푸른 원추리가 덮여 마치 잔디를 덮은 것처럼 바위섬들은 깔끔했다. 아름다운 절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평소와 달리 나도 모르게 열심히 스마트폰에 사진을 담았다. 유람선 안내자는 더 좋은 곳이 많다며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바다 위의 갖가지 바위들이 툭 튀어 올라온 모습을 보고 모두가 신기해했다. 마치 칼처럼 끝이 뾰족한 칼바위는 어떻게 저렇게 형성되었을까 신비함 마저 느껴졌다. 대문처럼 뻥 둘려 사람이 다녀도 될 것 같은 남문바위,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벼랑 끝 벌어진 틈새가 있어 곧 떨어질 것만 같은 흔들바위, 독립문처럼 생겼다는 독립문 바위, 홍도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거북바위는 거북이가 뭍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다. 이외에도 거칠고 투박한 바위가 빚은 각가지 형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유람선의 안내자는 구수한 사투리로 홍도의 역사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중에 인상적인 것은 홍도는 일 년에 120일은 배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큰 파도가 치면 배들은 모두 흑산도로 피신하고 몇 날 며칠을 속절없이 하늘만 바라본다고 했다. 그래서 홍도는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섬이 아니라고 했다. 듣고 보니 날씨라는 거대한 장벽을 나는 운 좋게 넘어온 셈이다.

      


 

 하루도 안 되는 시간으로 홍도에 다녀왔지만 섬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이 뒤늦게 밀려온다. 엣날 어렴풋한 기억 속에 사진 속의 그 기암괴석의 모습이 홍도였음을 현장에서 알았다. 남이 찍은 아무리 멋진 비경의 사진, 영상도 현장에서 보는 것보다 못했다. 내 발로 가서 내 눈으로 보는 현장의 진실이 가치 있음을 알았다. 막상 혼자 여행을 가보니 별 거 아니었다. 관찰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느 곳을 갈지 나는 어느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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