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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두 Apr 01. 2024

죽기 전 내 손으로 태우고 싶은 것

너 일기 언제까지 쓸래?

 매일 자기 전 마주하는 것. 만약 우리 집에 불이 난다면, 단 하나 꼭 챙겨야 하는 것. 결혼한다면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 절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죽기 전 내 손으로 태우고 싶은 것. 일명 김민준의 빅데이터. 바로 일기장이다. 

 

 때는 고2, 나는 대학에 관심이 없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밤까지 공부를 하며 소소한 추억을 쌓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먹거나, 바람 쐴 겸 놀이터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것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우리 집의 냉혹한 분위기가 싫어 집에 들어가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공부를 핑계 삼아 부모님을 설득해 독서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공부하는 법을 몰라 독서실에 앉아있기만 했다. ‘그냥 뭘 하든 최대한 이곳에 앉아있자’라고 마음을 먹어놓은 상태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딱히 계획이 없으니 그곳은 단순 와이파이존이 되거나 개인 영화관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대입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학습플래너’라는 것을 알게 되어 2000원짜리 싸구려 다이어리를 사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 첫 일기장이다. 

 

 고2, 고3 그리고 20살 재수까지 하루를 마칠 때면 학습플래너를 펼쳐 계획은 잘 이행했는지와 나를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편이라 일기엔 늘 칼바람이 불었다. 21살 대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학습플래너를 작성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버릇이 된 지라 잠에 들 때면 하루를 기록하고 싶었고, 결국 손바닥만한 줄칸노트를 사 날짜와 하루를 끄적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기다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평소 생각이 정말 많아 상상력이 풍부했던 나에게 일기장은 외장하드의 역할을 수행했다. 머리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며, 맘에 드는 노래 및 가사 그리고 영화 감상문까지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을 적기 시작했다. 심지어 애인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말이다. 그 후로는 메모강박이 생겼고, 현재는 갖가지의 메모장이 생겼다.

 

 올해 일기 9년차로 더 이상 적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일기를 일주일정도 밀리게 되면 죄책감에 사로잡혀 일상에 렉이 걸리고, 시쳇말로 뇌정지가 온다. 일기가 곧 내가 되고, 내가 일기가 된 것이다.(어쩌면 일기에 잠식당했을지도)

 

 ‘일기를 언제까지 쓸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일기를 정말 죽기 직전까지 쓸 생각이다. 앞으로 적어도 60년(?)은 쓸 텐데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 들어 심심할 때 꺼내 읽어볼 60권의 책이 생겨 기쁘다. ‘그럼 정말 책장에 꽂아만 둘 거야?’라고 물은 적도 있다. 흠... 막상 그렇게 되면 뭔가 아쉬운 감정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일기장을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을지 나름 생각해 보았다.


 첫째, 미래에 나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다. 아내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므로 '나의 전부(일기장)를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읽든 안 읽든 그건 아내의 자유다.


 둘째, 나중에 자서전을 쓸 기회가 된다면 일기장을 펴 ‘그땐 그랬지’하며 참고문헌처럼 여길 생각이다. 성공한 삶이든 아니든 내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보관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자서전 첫 페이지에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종종 상상하곤 한다.


 셋째, 죽기 전에 직접 다 태우고 싶다. 일기는 곧 나다. 고로 내가 죽게 되면 곧 일기도 죽어야 한다. 하지만 일기장엔 손발이 없으니 내가 죽기 전에 활활 태워줘야지. 

 

16.01.01 첫 일기장의 첫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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