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개짓하며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이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의 생은 행복한가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라는 제목의 노래이다. 70년대 후반, 가수 김만준이 불러 인기가 꽤 있었다. 노랫말 외우기에 젬병인 나도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아는 노래이다. 이제껏 나는 노래의 모모가 미하일 엔데 작가의 동화 < 모모>의 주인공 모모인 줄 알았다. 시간 도둑 회색신사가 훔쳐간 시간을 찾으려고 애쓰는 소녀 모모 말이다.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라는 구절 때문에 철석같이 믿었다. 얼마 전에 <모모>를 다시 읽으면서 노래의 ‘모모’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야 말이다. 흠, 조금 많이 창피하다. 생각해 보니 소녀 ‘모모’는 철이 들어도 너무 들어 철이 꽉 찬 아이였지, 철부지가 아니었다. 어쩐지~
노래 <모모>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1970년대 프랑스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로자 아줌마와 14살짜리 소년 모모의 이야기이다. 젊은 시절 창녀였던 로자 아줌마는 지금은 창녀들의 아이를 키워주며 살고 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아이들 중 한 명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맡겨지지만 사정에 따라 버림받기도 한다. 모모는 아랍인이고 로자 아줌마는 나치 수용소에 갇힌 경험이 있는 유대인이다. 이웃 역시 인종, 민족. 종교, 계급, 성별, 성소수자 등등 출신이 다양하다.
로자 아줌마, 모모와 이웃들은 서로를 돌보고 아끼고 사랑한다. 그들이 함께 보듬으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온기가 난다. 나는 뭉클하면서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고 슬프고 화가 났다. 난 좀 삐딱해진다. 사랑만 있으면 인간은 살 수 있나? 힘들고 어렵고 시궁창에서도 사랑으로 보듬고 살아라? 아이들이 거리에서 약을 팔고 먹을거리를 훔치며 사는 게 사는 건가? 아이들을 이렇게 대책 없이 두어도 되나. 모모와 거리의 아이들은 왜 고아원이나 빈민구제소를 가려고 하지 않는 건가. 도대체 왜?
“나는 숨을 쉬지 않는 그녀도 사랑했다.”
로자 아줌마의 죽음과 그녀의 죽음을 대하는 모모를 보며 삐딱거리던 마음이 풀썩 내려앉는다. 죽을 권리를 뺏기기 싫어 병원행을 끝까지 거부한 로자 아줌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로자 아줌마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모의 모습은 슬프다. 나는 사회 소외계층의 어려움을 시스템이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작품에도 언급되는 고아원, 자선 병원, 빈민구제소 같은 시스템 말이다. 로자 아줌마, 모모와 이웃들은 사랑 없는 빈민구제소에서 밥을 굶지 않는 것보다는 밥을 굶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으리라. 시스템에게 은근슬쩍 미루고 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이 들켜서 자꾸만 마음이 삐딱거리나. 불편한 마음이 삐그덕 삐그덕거린다. 시스템이 아무리 잘 만들어졌어도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삐딱거린다.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사람 그 자체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가족이 아니어도, 종교가 달라도, 성적 취향이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민족이 달라도, 사는 곳이 달라도, 직업이 내 이상과 달라도 말이다. 독서와 교육으로 단련된 이성과 체면은 사랑할 수 있다고, 사랑하여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사랑해야 한다고 모모가 말한다. 나는 여전히 자신 없지만 애써보리라 마음을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