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영혼의 풍경

술 사준 이들에게 건배

by 박경이

- <바위산 풍경: 협곡과 폐허 Rocky landscape: Gorge with ruins>

칼 프리드리히 레씽. 슈테델미술관. 프랑크푸르트

- <아기 세례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자> 로쏘 피오렌티노. 슈테델미술관


전시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우르르 돌덩이가 무너져 내린다, 폭우

습격이다 매복, 피뢰침 또는 번개?

아찔, 눈을 번쩍 뜨고 둘러보니

좁고 기다란 방에는 아무도 없다

뺨 맞은 듯 얼얼하고 그냥 서럽다

억울하고 분하기조차 하다

그림 앞에 제대로 서기도 전이었다


무너져 내리던 돌들이 자리를 잡는다

검은 구름 사이로 비도 멈춘다

평면으로 다가오는 버썩 마른 그림

녹슨 금속판을 두드려 편 듯

일말의 감정선을 허락하지 않는 바위산턱

직사각형 낡은 건물 두 개는

땅속에서 막 솟아난 철판덩이랄까

아니 관이다, 설마, 탑 같다...

또 흔들리고 구르는 바위들

돌산은 앞뒤로 움직인다

덮쳐오는 괴력에 떨며 눈을 비빈다...

무슨 일일까... 심장을 누른다

이상하네, 바위가 깨져 구르는데

저 건물 두 개는 왜 꿈쩍도 않는 걸까


항변하듯 다시 보니 구름 걷히는 하늘

풀도 파릇하고 물 흐르는 소리 들린다

안개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온기

낡았어도 튼튼한 집, 사람이 살 것만 같다 곧

창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이 나타날 듯

눈부시게 새하얀 식탁보를 깔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있을 듯

나를 불러 위로할 듯,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지럽다, a의 속임수에 된통 당했다

기운 없이 터덜터덜 2층을 다니다가

빨갛게 취한 아기 예수를 만난다*

술 먹지 말라는 아기 요한을 때려주고 흥이 오른 예수

사악한 얼굴로 술부대를 깔고 앉은 예수-바쿠스

의기소침한 나에게 아기 예수는 술부대를 내민다

오 주여, 금방 피가 돈다

내 생에 건배!

술 사준 이들에게 건배!


호텔에 돌아왔으나 제정신이 아니다. 수십 장 찍은 사진으로 다시 보니 풍경화가 아니라 설치물 같다, 볼수록 어이없다. a와 담합한 사기꾼은 누구며 그림의 제목은 도대체 뭔가. 돌산 풍경? 산봉우리와 하늘, 두 개의 탑... 중얼거리면서 화가와 제목이 찍힌 사진 하나를 찾았으나 흔들리거나 흐릿해서 읽을 수가 없다. 확대를 수없이 반복하여 어찌어찌 겨우 짜맞춘다.


칼 프리드리히 레씽 <바위산 풍경: 협곡과 폐허>

내 영혼의 풍경화, 처절한 자기분석서

한방에 나를 때려눕힌 내 인생의 그림

자빠져 누우니 편안타, 일어나면 되지

황무지-나를 60년이나 가꾸는 중인걸

wonder!



*로쏘 피오렌티노의 <아기 세례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자>. “두 어린이의 역할은 큐피드와 젊은 바쿠스를 떠올리게 한다. the two children, for their part, remind us of Cupid and young Bacchus.”는 설명이 있다.



<바위산 풍경: 협곡과 폐허>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벌거벗겼어도 입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