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네가 나였던 거여?
후각 못지않게 매우 사적이며 개별성이 강한 목소리! 대부분이 좋다고 생각하거나 무덤덤하게 감정의 파장없이 듣는 목소리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참기 어려울 수 있다. 유혹 당하는 동시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목소리, 특정하기 어려운 어떤 경험들의 표지. 그것에 대한 반응이나 좋고·나쁨의 판단은 사적일 수밖에 없으며 감정을 건드리는 표상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어떤 목소리에 대해 무관심을 부르기는 쉬워도 객관적이라 할 기술이나 평가는 어렵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자신이 듣는 것과도 다르니. 내부의 울림 가운데서 내가 듣는 내 목소리는 내 몸 밖에서 남들이 듣는 것과 다르다. 녹음해서 들어보면 안다.
좋은 목소리란 어떤 걸까. 다수가 듣기 편안하다고 여기는 목소리? 편안하다는 건 뭐지? 어쨌든 다수의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덜 보이거나 좋다고 느끼는 것을 좋은 목소리라고 치자. 그 좋은 목소리에 내가 거부반응을 보이거나 불편감을 느낀다면? 그 정도가 심할수록 ‘문제’는 나에게 있다. 그 목소리 탓이 아니다. 흔히 파장이 달라서 그렇다거나 예민하다고 뭉뚱거리지만 요약하면 ‘네 탓’이란 거다. 해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기 위한 교양과 상식의 표현.
좋은 목소리의 정수, 모든 요소를 고루 담고 있는 목소리가 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부드럽게 녹아드는 황홀감조차. 입트영과 귀트영, 이지라이팅에서 본문을 읽어주는 (남)성우다. 아마 모든 귀를 만족시키지 않을까.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표본 목소리. 처음엔 덤덤했으나 갈수록 진가를 알아보게 된 목소리는 파워 잉글리시Power English의 크리스틴과 모닝 스페셜Morning Special의 레이. 참 좋은 영어 목소리다. 그리고 폴은 좋은 목소리,에 규정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든다.
제니퍼의 완벽한 목소리, 20분짜리 강좌에서는 더할 나위 없다. 한편 오래 들으면 내 힘이 그쪽으로 이동된다. 지속되는 편안함이 일으키는 변덕이나 평화의 지루함이 아니다. 완벽함의 보이지 않는 틈으로 요구되는 에너지다. 그 목소리에 아죽 약간의 부피를 더한다면 두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으리라, 최수진처럼. 귀트영 피터의 목소리는 일 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들리지 않는다. 흩어지는 듯한, 응집성이 아쉬운 목소리. 입트영에서 최근 바뀐 (여)성우도 약간의 견딤이 필요한 날카로움이 묻어난다.
나는 왜 아무개의 목소리가 그리도 좋을까, 남들은 별로라는데? 나는 왜 아무개의 목소리가 듣기 싫을까, 다들 좋다는데? 정말 왜일까. 특히 어떤 부분이 좋고 거슬리는지, 표상을 따라 주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자기분석으로 가는 길이다.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 가운데 누구의 목소리와 비슷한지. 주체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기억이나 회상과 함께 불려오는 표상들을 열어젖히며 자신에게 사기치지 말고 질문해야 한다. 그렇게 답을 찾아나갈수록 견딜만하다. 그 감정과 비난은 내 안에 있는 내 것, 내게 있어왔던 것이다. 그거 ‘내꺼’였어?
그 목소리 탓이 아님을 인정하면 감정은 약화되거나 흩어진다. 그건 자신과 화해하고 친해지는 뜨거운 통과의례의 시간이기도 하다. 비단 목소리만이 아니다. 무수한 타자들과의 만남에서 회오리가 일 때마다 내 안으로 들어와서 질문해야 한다, 왜? 표상을 따라 내 안을 휘젓는 춤 가운데서 만나는 것은 나다. 특히 공부라는 것은 나도 몰랐던 나와 만나는 끔찍함을 친밀함으로 바꾸는 일련의 춤이다. 네가 나였던 거여? 모르고 싶었던 나를 인정하며 화해하고 진짜배기로 사랑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모든 일이 공부다. 힘들고 아픈 만큼 신나고 재밌다. 깊은 곳에서 길어올리는 기쁨. 생의 결핍과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 공부하는 진짜 이유다.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