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래 나는 뻥이다-파워 잉글리시Power English
김영희. 두세 번 탄력있게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포테이토potato’를 발음하시던 중1 담임선생님. 두 손을 좌우로 미끄러지듯 늘리며 도톰한 벨벳 같은 목소리로 ‘바나나banana',라 하시던! 전적으로 나를 ‘편애’해 주신 선생님.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던 시절, 손수 만든 옷과 시장옷을 잘도 어울리게 입어서 어린 가슴을 경탄으로 채우던 분. 내 생애 영어와의 첫만남인 줄만 알았던 그 두번째 만남은 기쁨이었다. ‘교사의 옷차림은 교재·교구의 일부’라는 내 주장은 김영희선생님께 얻은 것임을 지금 안다.
나는 영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나를 유혹했지만. 자유자재하는 표정을 가진 한자에 오래 반하고, 스무살에 중국어를 맛보며 그 발음의 장중함과 현란함에 빠져보았지만. 몇 차례 감정으로 거부하던 일본어를 마침내 배우고 꽤 사랑하며 즐겼지만. 독일어를 배우다가 나가떨어지기도 했고 그리스와 러시아 문자에 혹하여 두근두근 비밀을 풀듯 가만히 소리내 보기도 했지만. 스페인어는 책에 사전까지 사놓고 시작도 못했지만... 영어는, 내 언어의 역사 가운데 도도한 혼란이자 새까만 사랑으로 있었음을 깨닫는 중. 무심한 가운데 그것만의 맛을 느끼며 깊이 닿아보고 싶었음을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중이다.
‘파워 잉글리시Power English’. 영어로만 진행하는 크리스틴과 카메론. 20분 동안 진행자 둘이 ‘떠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비 쏟아지는 풀밭에 혼자 누운 느낌. 말꼬리 하나 제대로 잡았다 싶으면 어느새 표류하고 있는 나.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명료하지 않고 퍼석거리는 듯. 카메론이 칵칵 왁자하게 웃을 때마다 귀가 찌릿하여 라디오에서 잠시 떨어져야 했다. 와중에 다시 말꼬리 하나 잡는다 싶은 순간 끝난다. “I got the power!"라는 요란한 노래와 함께. 그래, 나는 뻥이다... -_-
'혼란과 소음'으로서 영어를 접했던 나는 그것을 눈으로 보아야 했다. 봐야만 뜻이 들어오고 마음이 놓인다. 보고 싶다!고 우기는 무의식의 주장을 자아는 거부하지 못한다.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으므로 청각은 내게 사기일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듣기를 잘 못하고 반복해서 듣기는 더욱 못한다. 듣지 않으니 들릴 리가 없으며 듣고 싶지도 않았던 영어. 문자를 붙잡아 앉혀야 하는데 크리스틴과 카메론은 시각을 주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영어의 시각적 보조기구라 할 우리말도 없으니. 튼튼한 자의식 속에서 들어야 하는 강좌 아닌 강좌.
신기하다... 크리스틴의 발음과 목소리는 들을수록 편안하며 정확하다. 커피 루왁처럼 비강을 맴도는 몇 줄기 매케함이 멋을 더하는 행복감. 발랄한 카메론의 음성이 영어로 설명하는 영어는 적확하다. 알아들을 때마다 감탄하며 함께 웃는 재미에 배부르다. 설정된 상황을 넘어 확장되는 실제 회화에 참여하는 듯한 현실감. 덕분에 바뀌는 맥락을 따라가느라 허덕이는 초보! 조각말 몇 개 알아서 도움되는 게 아니라 더 헷갈릴 뿐. 그냥 포기하고 가만히 듣는 수밖에. 언제 이걸 다 알아듣나, 실망과 외로움^^ 왜? 영어 세미나 갈 일 있어?
진행형으로 살아있는 경쾌한 시간. 점점 진행자들의 진가를 깨닫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참 잘한다. 질리지 않는 설명-수다, 얄팍하거나 가볍지 않은 가치관이나 사람됨도 엿보면서. 맛있는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은 두 진행자. 교재 앞에 실리는 크리스틴의 머리말 몇 개도 퍽 인상깊었더랬다. 무엇에 대한 공부든 자신에 대한 공부며 자신을 향한 길이다. 주체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본다, 자신을 만난다. 타자를 경유하지 않고 자신을 알 길은 없다. 이 거울 앞에 거짓증언하지 않고 맞장뜨고자 부단히 애쓰는 일,이 용기며 사랑일 터.
왜 그럴까, 나는 아시아인과는 영어가 더 안된다. 우리나라 사람과는 특히나.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중국 여학생들이 영어로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중국어로 대답했다! 뉴욕, 할로윈 밤에 구경하다가 밀려서 넘어질 뻔 했을 때 나를 잡아주던 젊은 여성. 괜찮냐고 묻는 영어를 듣고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이미 혀끝에 올라와 있던 짧은 영어는 나오지 못했다. 뉴욕대 유학생들, 미소와 함께 우리말이 나왔다. “고마워요, 괜찮아요.” 그들도 말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나와 영어와의 관계. 기묘하게 데면데면한 사랑, 결 어긋난 진짜 사랑.
그런가 하면 나름 완성된 문장이 아니면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때문에 뉴욕 센트럴파크 산책중 화장실의 위치를 물을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쳐야 했다. 프라하, 택시 안에서 내가 온전한 문장을 구성하고 있을 때 동행자는 단어 하나와 손으로 기사님과 완벽히 소통했다. 뉴욕 헌책방에서 톨스토이 책들을 찾던 날. 아저씨가 너무 못알아듣기에 나도 한 단어로 해볼까 싶어 ‘톨스토이Tolstoy’만 여러번 강조했더니 서점 바로 뒤에 붙어있는 장난감가게(toy store)로 데려다 주었다. 얼결에 대강 말문이 터지고 폭소... 30년도 넘은 톨스토이 두 권은 벌써 나를 떠났지만 몸을 기울이며 내 영어를 알아들으려 애쓰던 주인장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나-느림보 영어역사의 한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