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하나로 내게 들어와
너를 설명할 어떤 단어도 없다. 내가 가진 기억이 없어. 이름이나 얼굴은 그렇다 치고 네 교복 모양새라든가 어떤 분위기, 말투나 눈빛 따위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성적이나 수업시간 태도, 너의 냄새, 그러니까 방귀를 잘 뀌었다거나 졸았다거나 청소를 잘 했다, 공을 잘 찼다, 노래나 춤, 헛소리로 수업 분위기를 띄우거나 망치던 아이였다든가, 신발을 직직 끌고 다니던 녀석이었다든가, 욕이나 쌈박질, 다리가 부러졌다 등등, 많고도 많은 짓거리와 사건사고 하나, 떠오르는 정보가 이리 없단 말이냐.
그러나 너는 목소리로, 문장 하나로 내게 들어와 있다.
“비 한 번 맞고 죽을 것 같으면 우린 벌써 뒈졌슈~”
지금 쉰이 넘었겠네. 아, 이게 네 정보로군. 그렇구나, 1981년 충남 보령군 청라중학교 3학년.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꿈꾸듯 노래하며 첫발을 디딘 시골 중학교에서 시꺼먼 교복 빡빡머리의 너희를 만났다. 그리고 아마도 방학이 한 달쯤 남은 여름이었을 거야. 황순원의 <소나기>를 공부하던 날, 새내기 국어선생님은 너희가 앞으로 해야 마땅하리라 싶은 야리야리한 사랑을 속삭였으리. 소녀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더욱 조용히 반짝이는 눈으로 집중하던 너희들. 마침내 나는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라고 했겠지. 분위기에 어울리는 몇 아이의 발표에 이어 앉은 자리에서 네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그렇게 비 한 번 맞고 죽을 것 같으면유~ 우린 벌써 다 뒈졌슈~”
나는 아마 누구보다 더 크게 깔깔 웃으며 너의 특별한 감상을 칭찬했을 거야. 충격 같은 놀라움을 숨기며 화통하고 멋진 교사로 위장할 수 있었을 거야. 이후, 네 말은 내게 다가와 영원히 내것이 되었다. 너의 16년으로 ‘내뱉은 진리’는 내게 여러 개의 눈을 갖게 했다. 모든 사물의 위치 또는 자리를 바꾸거나 뒤집어보게 했어.
아마 지금 넌 ‘된사람’으로 살 것이다. 그때 도덕책에서 말하던 든사람, 난사람, 된사람 생각나지? 모두들 된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잖아. 지금은 거의 '돈사람' 하나지만 말이다. 게다가 되다못한 헛소리로 반짝 난사람 구실하는 경우도 잦으니 흥미롭게 지켜보는 기이한 재미가 있긴 하다. 종종 분노로 속이 터지기도 하지만 어쩌겠니, 삶은 변하는 것이니. 다시 낫게 바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아무튼 넌 된사람일 거다.
근데, 너 그 말, 말이야. 삐딱하게 앉아 뻗은 다리 하나 덜덜거리며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눈알에 힘준 채, 싸가지없이 한 거 아니었지? 으흐, 그랬더라면 아마 널 더 많이 기억했을지도 몰라. 혹은 네 말을 덜 기억하거나. 하여간 너를 찾는다. 내친 김에 이 녀석들도 찾았으면 좋겠다.
"야~, 이 배추 특이하게 생겼다."
"그거 담배유~"
"어쩌면 파가 한겨울에 이렇게 뾰족하고 파랗지?"
"아이고~ 선생님, 그거 보리유~~"
선생님? 그래,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