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놓인 내 안경을 보며 미소 짓는다...
유난히 작은 아이 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레 졸업할 때까지 내리 6년 동안 반배정을 받고 나면 젖동냥해서 겨우 끼니를 이어 자라지 못한 거 아닐까 쉽게 작은 친구가 한 명은 꼭 있었고, 그냥 그다음 작은 아이로 키 번호 2번은 항상 내 차지였다. 엄마는 내가 똘똘하고 야무지다고 유치원을 건너뛰게 하고 미술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하다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또래보다 한 해 먼저 학교에 들여보냈다. 개월 수로는 몇 개월 차이 아니었지만 엄마의 판단으로 난 나보다 덩치가 큰 아이들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좀 평균보다 크다 싶은 남자아이들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나의 두 배는 족히 돼 보였다. 친구들을 목을 꺾어 올려 보는 내 심정을 그때 누가 알고 있었을까? 키가 큰 여자 친구들 중에 몇 명은 아예 나를 애착 인형 다루듯 하기도 했다. 막 입학해서 1, 2학년 때에는 2 분단 첫째줄을 전세처럼 깔고 앉아 있어야 했고, 내 짝꿍이 되는 남자아이도 늘 세를 연장하는 땅땅똥똥족들이었다.
키순서대로 짝을 바꾸는 불합리했던 그 당시에는 내가 첫째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엄마를 졸라서 족히 5센티미터는 늘릴 수 있는 생고무 굽이 달려 있는 랜드로버 키높이 스웨이드 슈즈를 사서 신는 것이었고, 남은 한 가지 방법은 “선생님 안 보여요!”라는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난 난시가 조금 있었기에 맨 앞줄에서 안보이던 글씨가 둘째 줄 셋째 줄로 가면 조금 더 잘 보이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설령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 난 분명히 기꺼이 심각한 난시 소녀가 되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느낌은 답정너였을 것이다.
일단 전자의 방법을 택하고 송아지 가죽 색 랜드로버를 사서 신고 방에서 신어보고 또 신어보며 내가 얼마나 커졌는지 확인했지만 왠지 어설픈 성장에 불안함은 배가 되었고 난 잔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폐지로 모아두었던 신문지 한 뭉치를 조용히 방으로 들고 들어와 내 발을 올려놓고 연필오 발 둘레를 그리고 또 그리기를 수십 번. 가위로 일일이 오리고 또 오려 엄지 뼈가 욱신거림을 느낄 때쯤 꽤 쌓인 내 발 모양 신문지 조각들을 줍줍 하여 쌓고 또 쌓았다. 보기에는 그럴싸하게 두꺼워 보여 난 미소가 절로 나오기 시작했고, 완전범죄를 위하여 방으로 엄마 몰래 들고 온 랜드로버 신발의 가죽 밑창의 아교를 부러 뜯으며 밑창을 열고 뭉친 발바닥 모양의 신문지를 밀어 넣고 다시 밑창을 위에 덮어 놓으니 왠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뿌듯함이 몰아쳐 왔다. 지금 생각하면 비싼 신발 하나 망친 셈인데 그때의 나의 첫 번째 줄 탈출은 정말 절실했기 때문에 아무 다른 생각을 고려되지 않았다. 속으로 완성의 환호성을 치고는 예행연습을 해봐야 했기에 학교 갈 때처럼 양말도 챙겨 신고 신발 속으로 발을 넣어도 보았다. 섬세하지 못한 스킬 때문에 발가락 여기저기에서 까슬거림과 신문지 가상 자리들이 자리싸움을 하고 있었지만 나만 아는 비밀의 전쟁이었기에 그 또한 즐겼던 것 같다. 꽤나 부해 보였던 신문지 발바닥은 내가 올라서자마자 반은 족히 꺼져 보일만큼 부피가 줄어들었고 삽시간에 내 손가락의 뻐근함은 허무함으로 변했고, 내 온몸에 슬픔의 전율을 선물했다. “아..... 이게 뭐야... 푹 가라앉아버렸잖아... 괜히 신발만 엉망이 되었네,,, 엄마가 알면 혼날 텐데...” 아쉬운 데로 눈곱만치라도 커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다음날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등교를 했고, 담임선생님은 약속대로 짝을 바꾼다며 우리 모두 복도에 나가서 키 순서대로 남자 줄, 여자 줄 두 줄을 세우셨다. 난 줄 중간쯤에 과감히 서성대다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좌절을 맛보고 한 칸 앞으로 또 한 칸 앞으로 눈물의 전진을 해야만 했다. 랜드로버의 위력도 온 데 간데없고 신문지는 허당 그 자체였다. 내가 랜드로버 생고무 굽에 의지하고 있었을 때 친구들은 정말 성장통을 느끼며 뼈를 키우고 있었던 거다. 헉! 아이들이 더 커졌다. 난 다시 두 번째 고정 아이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포기할 내가 아니다. 플랜 B다. 이미 난 2 분단 맨 앞 줄에 배정이 되어 남자 짝꿍이 배정되어 들어오기를 기다렸고, 남자 친구들의 배정이 모드 끝난 다음 담임선생님께서는 쭉 한번 둘러보고는 앉은키가 유난히 커서 다른 친구들의 조망권을 방훼 하는 일명 숏다리 친구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셨고, 영광의 숏다리 들은 키가 작아도 방탈출을 하듯이 기쁨의 미소를 띠며 뒷자리로 이동하기도 했다. 난 것도 해당이 안 된다. 좌절하지 말자. 나한테는 플랜 B가 있다. 새로운 자리배정이 얼추 마무리되어 갈 때쯤 나의 오른손은 귀 옆을 스치며 조심히 올라갔고,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왜?라고 물으셨을 때 난 세상에서 최고로 불쌍한 슈렉 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눈을 해서는 약간 연기력 보태 울먹거리며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여요”라고 반은 안으로 먹는 소리를 냈다. 다행히 선생님은 내 말을 한 번에 의심 없이 믿어 주셨고, 나를 일으켜 세워 두 번째 줄에 서서 칠판을 보라고 하셨다. 물론 기가 막히게 잘 보였고, 그 한 줄 뒤의 공기가 이렇게 다를 줄 몰라 속으로 신이 났지만 어린 맘에 이왕 탈출하는 거 좀 더 멀리 가보자 싶어서 한 번 더 “잘 안 보여요”를 외쳤고, 세 번째 줄로 가서야 욕심은 그만~이라고 나 자신한테 말하며 “이제 잘 보여요”라고 했고 드디어 난 세 번째 줄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께서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내신 거다. “어머니 희야가 눈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안과검사를 한 번 받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뜨악이다. 언니가 유독 눈이 나빠서 일찍부터 안경을 쓰고 있었던 차라 엄마는 혹시 나도 눈이 나쁜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 건너편 상가에 있는 최안과에 나를 빛의 속도로 데리고 가셨고 내 머릿속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어쩌지? 다시 맨 앞 줄로 갈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성공시킨 프로젝트인데”. 안과 의자에 앉아서 차디찬 쇠 주걱을 한쪽 눈에 대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전광판의 글자를 난 반타작하기 시작했다.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 기하고 나름 명연기를 펼치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안 보여요'를 외쳤다. 지금같이 기계에 눈을 갖다 대면 대충 시력이 나오는 기술이 없이 의사와 나와의 소통으로 시력을 재야 했던 그 시절이라 가능했던 꼼수였을 테지만 최안과에 키가 크고 등이 살짝 앞으로 굽어 있었던 원장님은 속으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를 대충 알아차리셨던 것 같다. 엄마랑 따로 몇 마디를 주고받으시더니 처방전을 주셨고, 1층에 있는 안경원으로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셨다. 검사결과지를 가지고 가서 내밀었더니 안경점 사장님은 뭔가 알았다는 듯이 내게 이런저런 몇 가지의 안경테를 씌워주며 거울을 보라고 하셨고, 엄마는 왜 그랬는지 금테와 뿔테 안경을 하나씩 두 개의 안경을 한 번에 맞춰주셨다. 알이 끼워진 안경을 씌워주며 안경원 아저씨는 ”어때? 잘 보이니? “하셨지만 난 사실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수가 아예 없는 안경이었던 것 같다. 이미 나의 마음을 다 알아챈 어른들의 할리우드 연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때부터 안경잡이가 되었고, 당당히 학교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아무렴 어때? 이 정도면 해피엔딩 아냐?
그런데 난 지금 틈틈이 책이라도 보고 핸드폰이라도 들여다볼라치면 침침해진 눈을 끔뻑거리다 이내 돋보기를 찾아 쓰고 있는 지경이 되었다. 물론 눈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당연한 반백살의 노화에서 오는 어눌함이지만 왠지 안경을 잡아 들 때면 뭔지 모를 미소가 내 입가에 번지곤 한다. 후훗 웃기지? 지금은 이 걸그럭지는 안경을 정말 쓰고 싶지 않는데 쓰지 않으면 안보이니 말이다. 그땐 이게 뭐라고 거짓말까지 동원해서 콧잔등에 올려놓고 다녔을까 싶은 생각을 하면 아마도 그 안경은 부러움이었고, 꼬꼬마 탈출을 위한 거룩한 무기였던 것이라 생각하면 어릴 적 내 모습이 살짝 귀엽기도 하고, 자화자찬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꽤나 똑똑한 아이로 보이기도 하다.
난 지금 책상에 비스듬히 놓여 있는 내 안경을 보면서 40여 년 전 나의 첫 안경을 그리워하며 혼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