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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의 일기장 Jan 21. 2022

바나나

엄마가 선물해 준 노란 행복

세상에 쉬운 일이 있겠냐마는 어릴 적을 뒤 돌아보면 어려운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적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눈 뜨고 태어나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 내 주변은 너무도 풍족했다. 없는 것을 찾는 게 힘들 정도로 우리 집에는 부족함이나 허술함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집도 차도 TV도, 번쩍번쩍 금장식을 휘감고 있었던 전화기도 여러 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냉장고에는 늘 먹을 것이 그득그득했고, 냉동실을 열면 미제 수입 먹거리들이 차고도 넘쳤다. 물론 나는 태생이 코리안이었는지 버터, 마가린, 햄, 치즈 따위의 서양 먹거리에는 비위가 뒤틀려 다가가지도 않았지만 없어서 못 먹는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없어서 못 먹는 것과 있어도 안 먹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왠지 난 이긴 느낌이 들어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고 늘 자신만만해했던 것 같다. 


우리 동네 아파트 단지 둘레로 있던 상가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꽤나 규모가 있고 몫이 좋은 자리에 위치했던 삼미슈퍼를 난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왜냐면 난 VIP 단골손님이었기 때문이다. 삼미슈퍼의 주인장은 체구가 유난히 작고 마른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셨다. 몸이 얼마나 재었는지 근처에 손님이 채 도착도 하기 전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인지 고객인지 기가 막히는 촉으로 판단을 하고 잰걸음으로 손님을 응대하곤 하셨다. 분명 자상한 표정을 가진 얼굴도 아니었고, 비록 슈퍼 사장님이었지만 강남 부자들이 몰려 살고 있는 강남에서 내놓으라 하는 사모님들을 매일 상대하며 단 한 번도 비굴하게 굽신거리거나 자신을 작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내 눈에도 여느 상점이나 은행의 직원들의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던 슈퍼 사장 할아버지의 태도는 쫌 멋있어 보였다. 


바나나 한 손을 통째로 팔지 않고 낱개로 잘라 팔던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 같은 일도 그때의 일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들으면 정말요?하며 단번에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그때는 그 노란 바나나가 얼마나 귀하고 비쌌는지... 한 손을 한 번에 구매한다는 것은 정말 과감한 결정과 대소비를 불러오는 사건 같은 일이기도 했다. 내 기억에 파란 천 원짜리 한 장을 고스란히 내 손에서 가져가고 달랑 바나나 하나를 매몰차게 뚝 떼내어 내 손에 올려 주던 사장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그때 우리 엄마는 큰 손이었나 보다. 천 원이면 한 끼 반찬 두어 가지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노란 아이한테 시선을 뺏긴 나에게 늘 어김없이 하나씩 손에 쥐어준 울 엄마는 분명 여장군 같은 배포를 지닌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손에 쥔 나의 노란 보물을 볼라치면 난 쥐고 있는 바나나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맨 끝을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봐라! 나 바나나 먹는다!” 보란 듯이 자랑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부르주아 아이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씹을 것도 없는 바나나 따위는 개 눈 감추듯이 먹어버리지만 그때 그 귀한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이빨도 안 닿게 천천히 돌리며 녹여먹듯이 그렇게 조심스럽게 야금야금 아끼고 또 아끼며 먹었고, 먹는 내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가슴 벅찬 느낌은 하루를 고스란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나나 하나로 이렇게 돌려 깎기 하면서 얘기가 장황하게 길어질 수 있는 세상이 왔다는 게 좀 신기방기 하기도 하다. 엄마는 나에게 노란 행복을 선물하며 나의 환심을 사는데 늘 성공하셨고, 나는 엄마한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끔 이 노란 녀석을 통해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과일이 종류별로 수북이 쌓여 있는 마트에 들어서면 그 많은 과일 중에 가성비 갑인 과일이 지금은 바나나일 것이다. 한 손 가득 들어 올려도 몇천 원 안 하는 그 아이가 쇼핑 카트에 안착하면 벌써 꽤 많이 장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큼지막한 바나나를 보면 가끔 어릴 적 너무도 귀했던 그 하나의 노란 행복이 떠오른다. 이빨이 나지 않은 아가들이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과일이 바나나 아닐까? 나도 나의 두 아이들 키울 때 첫 과일로 바나나를 작을 티스푼으로 긁어 조막만 한 아가 입에 쏙쏙 넣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매일 슴슴한 이유식에 지친 아이들은 버터처럼 부드럽고 입에 그냥 닿기라도 하면 바로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함에 참새 입을 해서는 연신 더 달라는 시늉을 했던 순간도 난 분명히 기억이 난다. 바나나는 나에게 그런 과일이다. 엄마가 내게 선물했던 사랑의 노란 행복이었고, 내가 내 아이들에게 달콤함을 선물한 첫 과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노란 행복을 줄 수는 없겠지만 내가 느꼈던 그 귀한 행복을 느껴주었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집 앞 마트에 나가 샛노란 바나나 한 손을 같이 사면서 엄마의 노란 행복을 도란도란 나눠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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