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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미쌤 Sep 24. 2022

나 사용설명서를 드립니다.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러 들어왔다. 요즘은 전보다 나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다. 사회생활 속에서,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오히려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내게는 매우 난제였던 “경계(boundary)”를 알아차리고 세우는 것을 조금씩 해보는 중인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의 경계는 사실 평화로운 일상에서는 알아채기 쉽지 않다고 느껴진다. 우리는 태어나자마 엄마와 한 몸인줄로만 알다가 엄마와 자신이 별개의 신체를 지녔다는 신체적 경계를 알아채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기억은 안나지만 그 때도 참 힘들었을 거다. 별개의 신체를 지닌 떨어진 존재라는 건 상당한 두려움과 막막함을 수반하기에.

지금도 내가 경계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기간 계속되는 힘든 마음이 있었고, 나를 말 그대로 뒤흔들어놓는 외부의 공격 혹은 조금씩 선을 넘고 나를 찌르는 여러 차례의 외부의 시도들이 있은 덕분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나의 경계를 알게 되는 것은 분노, 수치심, 모멸감 등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내가 상처받을 때인 것 같다. 자꾸 “~같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글을 쓰는 지금도 사실 그 메커니즘을 전부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완벽히 비유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몸에 상처가 날 때 비로소야 우리는 당연했던 우리의 몸을 인식하고, 마음에 상처가 날 때 비로소 당연히 존재했던 나의 마음의 경계를 인식하는 게 아닐까. 아무리 선량하고 선하고 아량이 넓은 사람일지라도, 사람이라면 모두 공격을 받을 때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동적인 방어태세나 방어기제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 몸에 상처가 날 때 이를 아물게 하려고 우리 몸 안에서 자동적으로 백혈구 부대가 몰려오고 더 나아가 다쳤던 비슷한 상황에서는 유달리 더 조심하게 되고 나를 아프게 한 물체를 무서워하게 되는 등의 반응이 따라오듯이. 우리 마음에도 상처가 나면 이를 치유하려는 작용뿐만 아니라 다음에 같은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미리 방어하는 작용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상처를 통해 나라는 사람을 배우게 되고 인식하게 되고 알게 된다. 아, 내가 여기 있었구나. 내 마음의 선은 여기였구나.

같은 말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기억조차 나지 않게 스쳐지나가는 것은 사람마다 경계와 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상처받는 순간들이 있고 그 상처는 나라서, 내가 그런 모양이고 그런 선과 경계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는 사람의 경계를 내가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경계를 잘 알려면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는 과정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그 상처들은 단지 모두 해롭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어떤 말로는 ‘적절한 좌절 혹은 결핍’, 다른 어떤 말로는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 ‘사회화의 과정’ 등등 참 다양한 단어로 표현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모두 다르고 다르면서도 함께 살기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고 다시 그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받은 같은 상처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아서 배려하고 조심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나는 나라는 사람을 존중해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존중은 상대가 내게 사용하는 언어에 담겨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무리 가깝고 친하고 격식 없어도 욕설을 쓰거나 험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고 아끼고 애정한다는 것을 자주까지는 아니어도 때때로 다정하게 표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게 무례하고 거친 표현을 쓰며 말을 하거나 배려없이 과하게 나의 생활을 침범하면서 자신의 감정대로 나를 이용하거나 소비하려고 할 때, 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상대에 대한 존중없이 그 상대에 대해 과하게 함부로 말할 때 등등의 상황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무진장 화가 나기도 한다. ​


지금까지는 그러면서도 그 때 그 때 거절의 표현을 하지 못해왔던 것 같다. 나의 거절 또한 상대에게 상처를 줄까봐 미리 염려하여, 나 혼자 계속해서 상처를 받고 속으로는 화를 가득 느끼면서도 이를 숨기고 결국에는 혼자만 힘들고 지쳐서 결국 상대도 모르게 마음을 닫아버리고 멀어져버리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연애에서 나는 거절의 표현을 처음으로 삭히지 않고 해보면서 그렇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거절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에 대한 사용설명서라고 이해해준다는 것을 배웠다. 나의 정당한 거절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나에게 무례하게 분노하고 실망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모양이 그렇기에 그런 것이고 그 감정은 그 사람의 몫인 것이지,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 또한 나의 모양과 선과 경계가 이렇게 때문인데, 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한다면 그 사람은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의지가 없는 것이기에 유의미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배웠다. 모두와 잘 지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 모양과 경계와 선을 지켜주고 이해하고 수용해주는 사람과 나역시도 그 사람의 모양과 경계와 선을 수용해주면서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것이다.

결국 거절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가 아니라 ‘나 사용설명서’인 것이다. 다만, 사용설명서의 말투가 친절하고 내용이 자세할수록 이를 읽는 사용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듯이, 거절의 표현 역시도 상대가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드럽고 유머스럽고 자세할수록 나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 같다. 거절은 “잘” 해야 하는 것이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을 느끼는 데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다. 아직 거절을 “잘”하는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거절이라는 걸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뿌듯하고 감사하다. 나라는 사람의 경계와 선과 모양새는 내가 제일 잘 알기에 나만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그 설명이 거절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함께 잘 지내기 위해서는 더 잘 설명해야 하고 거절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그래서 나를 더 제대로 보호하고 지킬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상처들을 통해 많이 배우고 깨닫기를, 그래서 예상치 못한 큰 상처와 공격에 와르르 무너지기보다는 그 전에 나를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남은 인생동안 나도 나에 대해 더 배우고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할 수 있기를, 그리고 상대의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만나 서로를 그 모양 그대로 아껴줄 수 있기를, 그리고 내 곁에 서로의 경계를 잘 알아서 대신 화내주고 위로해주면서 다독여줄 수 있는 소중한 친구와 가족이 있기를, 그런 것들을 조심스럽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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