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결산-
어느덧 2025년 1월 5일이 되었고, 한 살을 더 먹었다. 올해의 새해는 병원에서 맞이하게 되면서 은근슬쩍 지나가버려서 아직 나는 24년을 살고 있는 기분이다. 어머니의 수술은 예정대로 12월 31일에 진행되었고, 퇴원할 때까지도 의사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파업시국으로 수술 자체도 미뤄질 수 있었던 터라 무소식이 희소식이다하면서 제때 수술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자식으로서 편찮으신 부모님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아직도 정말이지 무겁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당연히 서울에 있는 내가 해내야지 하면서 혼자 감당했던 21년도와는 달리 이번에는 언니에게 솔직한 마음을 나누고 같이 해주면 좋겠다고, 그때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 덕분에 언니와 함께 나누어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아직도 언니에게 솔직하게 그때그때 내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언니한테 말하려고 노력하고 또 언니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수용해줘서 언니동생사이도 많이 성숙해져가고 있는 것 같다. 올해는 언니랑 단둘이 처음으로 자매여행도 여름에 동해바다로 다녀왔다! 언니랑 나는 참 다르지만,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자매이기에 앞으로도 함께 결정하고 감당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작년에 엄마의 건강적신호를 겪으면서 평소에는 서로의 일상이 벅차 자주 연락하지는 못할지라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서로를 위해주고 함께 고민해줄 어쩌면 유일하고 중요한 가족이라는 믿음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둘을 연결해주는 끈으로 충분하겠다는 조금은 부드러워진 기대와 마음을 갖게 되었다.
엄마와 함께 입원했다가 퇴원한지 얼마 안 돼서 몸도 마음도 다소 지쳐있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24년 회고글이라도 남겨볼까 하고 잠시 나왔다. 아직 뭔가 정리가 되진 않아서 글도 횡설수설일테지만 지금까지의 기록들을 보면 그 글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의 내 생생한 마음과 경험들이 담겨있어 좋았던 것이니, 미완성의 글이라도 휘리릭 적어보려고 한다.
작년이라고 부르기 어색하지만, 2024년은 내게 꽤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새로운 직장으로(Wee클래스에서 Wee센터로) 옮긴 첫 해이기도 했고, 1정 연수를 이수하여 이제는 '저경력교사' 타이틀을 한꺼풀 벗은 해이기도 했다. 여전히 Wee센터에서도 막내긴 하지만 다음 학교를 갔을 때에는 7년차일테니 더이상 '모르는 게 당연한 귀여운 신규 혹은 막내' 포지션은 없을 것이기에. 사실 작년부터도 더이상 신규대우는 아니었다. 당장 닥친 일들을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경력직 대우였달까. 신규이던 시절에는 어서빨리 나이를 먹고 고경력 교사가 되어 그 무엇도 무섭지 않은 노련한 어른이 되고 더 높은 호봉이 되어 좀 더 숨쉴만한 월급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1급 정교사가 되고 경력직 대우를 받다보니 경력이 쌓일수록 책임도 기대도 높아지고 '모르는 게 죄'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경력'의 의미와 무게를 조금은 느끼게 되었달까. 사실 교사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승진과 연봉협상을 위해 커리어에 정진해야 할 큰 필요성은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냥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연차가 차고 호봉이 오르며 사실상 성과급이든 월급이든 호봉에 따라 받을 가능성이 높다보니 경력계발, 자기계발을 해야할 동기부여가 약해지는 것도 같다. 다만 다양한 연령대의 여러 사람들(학생, 보호자, 교사 등)을 상대하고 인간관계에서 계속해서 성숙한 어른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교사, 그리고 특히 상담교사는 개개인의 내밀한 이야기와 마음을 다루기 때문에, 교직사회에서도 흔히 말하는 사회에서의 '물경력'을 쌓을 경우(단순히 연차만 쌓일 경우) 스스로 계속해서 괴로움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피하고자 한다면 계속해서 일도 쳐내고 사람도 피하면서 어떻게든 연차만 쌓고 나 편하자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해서 행복할까? 하고 생각해보면, 나라는 인간은 일단 그렇게 하지도 못하거니와 그렇게 산다고 행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왕왕 짖으면서 자기방어를 하고 일을 쳐내고 내가 쳐낸 일을 남에게 떠넘기면서 그렇게 사회생활을 해서 내게 남는 것은 뭘까. 일단 사람은 남지 않을 것이고, 그때 그때 내 몸은 편하겠지만 내 능력과 경험은 여전히 부족한데 경력은 쌓여서 책임을 지는 직책과 업무들이 계속해서 권해질텐데 얼마나 무서울까. 할 줄 아는 게 없이 직책만 올라가서는 더이상 버티기 어려운 것이 요즘의 교직사회가 아닐까. 예전처럼 교사는 편한 직업이 아니다. 서비스대상자들의 요구도 많아졌고 줄어든 아이들에게 맞춤형 교육을 제공해야 하기에 그만큼 많은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데, 보수수준도 사회적 대우도 예전만치 높지 않다. 청소년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조력하는 보람을 느끼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학교현장에서 교사로 정년까지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 맞지 않는 직업을 수십년 유지하다보면 마음이든 몸이든 병을 얻게 되는 모습을 지금까지만 해도 많이 봤기에.
불안은 행동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므로 불안해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찾고 성취해오던 나의 모습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불안이 내 인생의 지휘권을 갖고 나를 휘두르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학업적, 지적, 커리어적 성취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작년과 올해는 성취보다는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었고 특히 하반기에는 가족에게 많이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교사로서의 경력이 쌓여감에 따라 단지 연차만 찬 교사가 아니라 성숙하고 현명한 경력직 교사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명확히 잘 모르겠지만, 그저 현재 경험하는 개인으로서 삶의 과업과 교사로서 내가 하고 있는 업무들에 충실하기로 했다. 생각없이 매너리즘에 빠져 뇌를 빼고 꼭 해야할 것만 대강 하면서 시간만 흘러가게 두기보다는, 내가 하는 업무의 구조와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고도화할 수 있는 부분을 고민하고 발전도 시키면서. 상담을 할 때도 잘 모르겠고 무서우니까 연계에만 급급하기 보다는, 같은 연계를 하더라도 지역사회에 어떤 자원들이 있는지 자원마다 어떤 특색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학생에게 fit한 자원을 연계해주려고 고민하고, 상담자로서 부족함을 계속 느끼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아이의 어려움에 함께 머물면서 그 시간시간 만큼은 아이와 함께하고 견뎌주면서. 그렇게 현재에 충실하면서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나를 마주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내가 가고 싶은 방향과 성장의 계단이 올라갈 타이밍을 알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은 기니까, 너무 숨차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게는 빠른 성취보다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삶이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뭘까'라고 센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는 명쾌한 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한동안 질문이 마음에 남아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내 생각에 '어른'은 책임을 지는 존재인 것 같다. 내 한 몸 돈벌어서 먹고 살며 책임지는 것을 포함해서, 내 부모를 부양하고 책임지며, 내 자식을 기르고 책임지는 것까지 경험하면서 더더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른'은 한없이 불행하고 무거운 삶만 사는 것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 속에서도 기쁘고 황홀하며 행복한 찰나들이 분명 넘치게 있을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만끽하는 것이 어른으로서의 무거운 삶을 무겁기만은 하지 않게 만들어줄 것이다. 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나 혼자만 늙어가는 건 너무 외롭고 고독하지 않을까... 사별도 겪고 어머니를 돌보면서 느낀 점은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없으니만 못한 가족도 있겠지만... 여기서의 가족은 아웅다웅 싸우고 힘든 시기를 겪더라도 적어도 사랑과 믿음과 희생이 그 기본에 전제된 가족이다). 이 험난한 세상,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고 무섭고 어려워... 물론 원하는 대로만은 되지 않겠지만, 자식도 둘은 낳아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24년에는 위기와 갈등을 겪으면서 오히려 시련을 딛고 믿음이 단단해져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결심을 한 이유는 내 모든 것을, 부족하고 약한 부분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고, 나의 분신처럼 모든 것을 한 방에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당연히 불가능한 기대다) 내가 충분히 설명하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해가 완벽히 되지 않으면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 너는 그렇구나 인정하고 수용해주는 사람이라서다. 그리고 무엇이든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서로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면서 같이 노력하자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한 번 뱉은 말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서다. 24년에는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모두 뵀고, 남자친구와 같이 나의 아버지도 뵈러 갔다. 식장들어가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니, 무엇이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서도 24년-25년의 키워드는 나의 소중한 원가족과 더불어 앞으로 꾸릴 가족을 포함해 '가족'이 될 것 같다. 결혼, 잘 준비할 수 있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결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머니와의 본가생활도 애틋해져서 독립전까지 함께 일상을 보내는 순간순간 좀 더 다정하고 따뜻한 딸내미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24년에는 새롭게 바뀌어 가는 친구관계의 모양을 받아들이는 나만의 내적 과정이 있었다. 친했던 친구들이 서로 다른 직장을 갖게 되고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예전처럼 일상을 공유하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졌고 공감대도 적어졌다. 실제로 연락하거나 만나는 빈도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대학교 다닐때까지만 해도 비슷한 하루하루를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졸업하고부터 2030대에는 정말이지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이다보니, 누구는 공부, 누구는 취업, 누구는 결혼, 누구는 출산까지 가고, 서로 인생의 속도가 다른 것이 여실히 느껴질 수밖에 없는 시기로 다가왔다. 그리고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지향하는 삶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서, 이제는 더이상 비슷한 내 옆자리 짝꿍이 아니게 되었기에. 쉽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기 어려워졌고, 그저 나와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각자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속도로,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며 응원할 수밖에. 친구들에게 많이 티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속으로는 정말이지 참 많이도 서운하기도, 속상하기도, 아쉽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친구이자, 힘든 일이 있을 때 달려와줄 친구이자, 기쁜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뻐해줄 친구 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예전보다는 멀어졌지만 또 너무 멀지는 않은 새로운 친구관계의 모양과 거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반대로 나또한 누군가에게는 서운함과 아쉬움을 준 친구였을텐데, 그럼에도 내 친구로 남아주는 친구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적다보니, 부유하던 많은 생각들이 타이핑된 글자로, 실체로 내려앉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아직 24년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데, 25년이 도래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겠지. 나의 25년도는 어떨지 조금은 기대가 된다. 내 주변의 모두가 건강하길, 무사하길, 이왕이면 행복한 순간이 많길, 진심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