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면서 "아깝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다. 대학을 갔을 때도, "아깝다, 반수라도 해보면 어떠냐", 임용고시를 통과해 교사가 되었을 때도 "아깝다, 다른 전문직을 준비해보면 어떠냐"하고. 그러다보니 종종 나도 나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정말 이 정도로 만족해도 괜찮을까?", "더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도전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지금보다는 더 성취하고 업적을 만들어낼 능력과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기에 정말 나는 이대로는 아까운 사람인 게 아닐까?"하고. 내 능력과 잠재력(potential)에 대해 좋게 평가해주는 사람들에게는 고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내 실제보다 나를 더 과대평가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현실을 박차고 나가 이미 가진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에는 불안하고 또 그렇게 절박하거나 용기가 나지는 않고. 그러다보니 마음만 어지러운 딜레마의 상태가 한동안 이어져 왔다.
다만 내가 아깝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고,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나의 심리적 예민함과 부족한 체력! 정말 이상적으로 머리(소프트웨어)만 놓고 보자면 최대로 뇌를 가동해서 더 훌륭하고 뛰어난 성취를 이뤄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 결과물을 낼 때까지 견뎌야 할 수많은 인간관계 속 미묘한 긴장감과 이미지관리, 경쟁을 버텨낼 하드웨어를 갖추고 있지는 않다. 같은 경쟁적, 성과주의적 상황이더라도 사회적 민감성이 높고 기질적 예민함이 높은 나는 모르긴 몰라도 남들보다 배로 더 괴로웠을 것이 분명하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둥글둥글하고 무던해보이지만, 사실 나는 꽤나 예민하다. 최근에 읽은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저, 서스테인)“라는 책에서 정말이지 속이 다 후련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저자는 책에서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예민한 행동과 예민한 기질은 다르며, 외향적 예민과 내향적 예민도 다르다는 것을 명료화했다. 명쾌했던 부분은 우리가 흔히 말해서 예민하다고 말하는 것은 '예민함을 표출하는 행동'에 가깝고, 진짜 예민한 사람들은 예민함을 표출함으로써 타인이 느끼게 될 불편함까지 예상하여 예민함을 거의 표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완벽히 HSP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나는 예민한 기질의 사람이구나 하고 스스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작 초예민성을 드러내는 행동과 관련이 깊은 성격 요소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잠재적 나르시시즘과 잠재적 사이코패시 성향의 사람들이었죠.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서스테인) p.36
예민한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도 고스란히 느끼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자신이 더 불편해지니, 조금이라도 남에게 폐가 될 것 같은 행동은 강박적으로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 오히려 겉으로 봤을 때는 잘 웃고, 그저 순둥순둥하게만 보이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HSP들은 자신의 예민함을 거의 표출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자신과 보이는 모습 사이의 간극이 굉장히 크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서스테인) p. 55-56.
고통의 크기를 따지자면, 손해에 따른 고통보다 갈등에 따른 고통이 훨씬 높기 때문에 HSP들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타인과의 갈등을 원천 차단하고자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참고 맞춰주면서 조용히 지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HSP들이 지니는 '내향적 예민'의 정체입니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손해에 따른 고통이 갈등에 따른 고통보다 훨씬 크다면 그들은 자신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계속해서 부딪힐 겁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보다 자신의 이득을 더 중시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낮은 우호성을 지닌 사람들의 중심 특질이며, 이렇게 자기중심성이 강한 성격에 고 개방성(세상에 대한 열린 감각)과 고 신경성(스트레스에 대한 낮은 역치)까지 추가된다면, 바로 이러한 성향이 '외향적 예민'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서스테인) pp.34-35.
다른 내용들도 너무나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오늘의 글에서는 나의 이러한 고민에 조금의 답을 제시해주었던 문구들을 위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진취적으로 성취해나가는 것과 위험과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모순적 방향성이다. 어쩌면 나의 이상적 자기는 전자이고, 실제적(현실적) 자기는 후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후자의 기질과 성격으로 전자를 추구한다면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하면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첫 번째, 그리고 어떤 행동을 택할지 정하는 것이 두 번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예민한 사람이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아실현의 측면에서도 최대한 야심을 내려놓을 수록 좋고(p.68)' 저자는 '별 탈 없이 잔잔하게 사는 게 중요한 사람(p.167)'이라는 문구를 보고 아쉬운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결국 둘 다 가질 수는 없구나 하면서 아쉽기도 하고, 저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자신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부럽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둘 다 놓지 못해서 혼란스럽고, 내가 결국 어떤 것을 더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상태이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들이 그나마 둔감해지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환경에서 불필요한 자극을 최대한 적게 받으며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호적이고 통제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려면 환경적으로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이 최선입니다.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커리어나 돈, 명예와 같은 자아실현의 측면에서도 최대한 야심을 내려놓을 수록 좋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물론 좋지만, 뭔가를 쟁취하고자 아득바득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자극들에 휩쓸릴 일들이 많아지며, 이러한 진취적 태도는 예민한 성격이 지니는 위험-회피 패턴과 계속해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성과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HSP로서 남들과 경쟁하며 사는 삶이란 하루하루가 고비인 날들일 겁니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서스테인) pp. 68-69.
의무적 자아가 강한 사람이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이상적 자아가 강한 사람이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우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
자, 여기 두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나에 대한 기대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 '현실 속 나'에 집중하면서 그저 현재에 충실히 살아가는 겁니다. […]
두 번째 방법은 'Just do it!', 그냥 뭐라도 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조금이나마 생산적인 일들을 하면서 내 이상적·의무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간의 차이를 줄여나가는 겁니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서스테인) pp. 153-154.
호랑이를 꿈꾸지 않는 고양이는 평화롭습니다. 호랑이를 꿈꾸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양이는 괴롭습니다. 호랑이를 꿈꾸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고양이는 활력이 넘칩니다. 이 중 어떤 모습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예민한 내가 진취적인 꿈을 좇겠다고 결정했다면, 오히려 덜 쉬고 더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 더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겁니다. 하지만 만약 노력하지 않으면서 이상만 높게 가진다면, 내가 가진 예민성이 나의 정신적 고통을 한층 더 악화시키게 되겠죠. 물론 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다만 이렇게 살 거라면 남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저울질해서는 안 되겠죠?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서스테인) pp. 154-155.
그렇다면 야심과 이상을 내려놓을 수 없는 진취적인 회피형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결국 에너지 관리의 문제입니다. […] 내 커리어를 위해서라면 일을 위한 스트레스는 죽을 둥 살 둥 버텨내면서 다른 방면의 스트레스는 최대한 나에게 오지 않게끔 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불필요한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는 철저하게 차단하는 것입니다. […]
이런 식으로 에너지 관리를 해나가면서 박박 긁어모은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켜 진취적인 커리어를 만들어나가는 거죠. 에너지 관리에 대한 선택과 집중의 전략과 내 야심을 위해 일정량의 스트레스까지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진취적인 회피형 인간의 자아실현은 결국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서스테인) pp. 166-167.
모든 인간의 체력과 신체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거기에 더해 예민한 사람들은 스트레스의 역치가 더 낮고 몹시 잘 발달된 레이더로 수많은 감각·감정에 대한 사회적 정보를 처리하므로 남들보다 더 쉽게 지치고 소진(방전)될 수밖에 없기에 일반적인 수준보다도 더 낮은 한계선이 적용된다. 즉 '다정함도 체력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무엇이든 체력과 여유가 있어야 해낼 수 있는 것인데, 예민한 나에게는 더 많은 한계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한계를 정확히 알고 그 한계선을 최대한 넘지 않게 우호적인 환경을 선택하고 스스로를 돌보면서 현재와 소소한 일상에 만족하고 자주 행복감을 느끼려고 노력하거나, 한계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진취적으로 해내고 싶다면 이 한계를 늘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전자를 위해서는 남과 비교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고 충분히 나를 아끼고 긍휼하게 여기는 '정신적 수양'이 필요할 것 같고, 후자를 위해서는 우선 신체적 체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신체적 운동'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예민한 내가 사회생활을 무탈히 지속하기 위해서는 둘 다 필요하겠지. 근육을 이완하면 감정이 차분해지고 감정을 다스리면 몸이 편안해지듯이, 우리의 신체와 정신은 결국 연결되어 있으니까.
타고나기를 에너지와 활력이 적기도 하고, 그 적은 에너지조차 단지 같은 일상을 살아도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인식하고 처리하느라 금방 소진되니, 나는 남들보다 쉽게 지칠수밖에! 그런 내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더 자주 행복하고 덜 불행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볼만한 것들을 책을 참고해서 정리해봤다.
나를 해롭게 하는 인간관계는 과감히 정리하고, 내게 좋은 영향을 주는 인간관계에 선택적으로 집중하기
검증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첫번째 부탁에는 우선 "NO" 거절하기
나의 감정에 압도되지 않도록 감정일기 쓰기
거창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운동하기(산책, 윗몸일으키기, 스쿼트?)
나의 에너지가 충전될 수 있는 혼자하는 취미생활 유지하기(책읽기, 글쓰기?)
미래를 도모해야 할 관계에서는 억압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솔직하게 내 의견과 감정 표현하기
일할때도 바른 자세로 호흡하는 것 잊지 않기(일하다보면 구부정하게 숨도 잘 안쉬고 눈도 잘 안 깜박임)
미묘한 사회적 정보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거나 관계갈등이 예상되어 긴장감이 올라갈 때는 잠시 자리를 피해서 물리적·심리적 거리 확보하기
남들에게 좋아보이려는 인정욕구를 내려놓고, 나에게 좋은 사람이 먼저 되기 (혼잣말로 나에게 스스로 칭찬해주고 다독여주기, 나비포옹도 좋은듯!)
작고 소중한 에너지를 가진 내가 아쉽다. 체력도 많고 심리적으로도 둔감했더라면 더 많은 것들을 이루고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기쁘게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면서. 그렇지만 작고 소중한 에너지를 가진 예민한 나만이 가진 장점과 센스들도 분명 있을테니, 바꿀 수 없는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고 이왕이면 어여삐 여겨줘야 하지 않을까. 어쩔거야.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오랜만에 책을 읽었는데, 내가 설명하기 어려웠던 나의 모습들을 설명해 주어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우연히 만난 책에서 얻는 이러한 영감이 내게는 기쁨이자 충전이 된다. HSP들은 심미안도 뛰어나다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감수성을 발휘하거나 영감을 받는 것을 좋아하긴 하는 것 같다. 미술이나 음악은 잘 모르겠고 주로 글에 반응하는 것 같긴 하지만..? 작가님이 하는 북토크도 신청해봤는데 선정되야 갈 수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북토크에 가는 것도 나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한 번의 외향성을 발휘하는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아 내심 기대가 된다. :-)
마지막으로 내게 든든한 위로로 다가온 저자의 따뜻하면서도 확실한 말로 마무리지어보려고 한다. 나에게도 나만의 정체성을 완성할 언젠가가 오리라는 것을 앞서 살아본 선배가 확실히 말해주니 안심이 되기도,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나의 내적 갈등과 고민은 계속될테니, 지켜봐주시라!
예민함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HSP의 장점들을 열거해가며 연신 화이팅을 외치고 있지만, 제가 볼 때 현실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의 최대 장점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인내하며 성장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
HSP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점 한 가지는 예민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본인의 정체성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최재훈, 서스테인) p.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