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뤼미쌤 May 06. 2023

취약성, Vulnerability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영단어 두개가 있다. authenticity와 vulnerability인데, 흔히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지도 모르겠다. authenticity는 '진실성, 진정성'이라는 의미이고 vulnerability는 '취약성'이라는 뜻이다. 요즘 들어서 더 많이 느끼는 것인데 나는 개인의 취약성을 진솔하게 나누는 대화를 좋아하고, 자랑이나 과시가 만연하거나 그냥 가십을 떠나르는 대화에는 피로감과 불편함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성향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취약성을 말하도록 부담을 주는 것이 될 수 있고 그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에는 웬만하면 내가 좋아하는 만남을 위주로 가져가려고 노력 중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의미는 없지만 친목도모를 위해 원치 않더라도 식사나 술자리에도 낄 필요가 있을 상황도 있을텐데, 특히 교직 사회에서는 운좋게도 다른 사기업들처럼 굳이 그렇게 해야만 할 상황이 많지 않아서 내가 힘들고 즐겁지 않은 만남에는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느낀다. 그런 점은 장점인 듯 싶다. 아무튼 나는 진솔성, 일치성, 정직성, 취약성과 같은 특성들에 큰 가치와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이다. 영단어로 말하자면 authenticity, genuineness, honesty, congruence, vulnerability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넷플릭스에서 연애와 사랑, 결혼을 다루는 프로그램들을 즐겨 본다. 나는 solo, 결혼말고 동거, 연애의 참견 같은 프로그램은 혼밥할 때 가볍게 보기 좋고, 이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기하고 경이롭기도 하고 여러 갈등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관찰하면서 다시금 내가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겸손함을 느끼기도 하여 이러한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한다. 우리나라 프로그램 말고도 해외 프로그램 중에는 특히 "Love is Blind"라는 프로그램을 챙겨보는데, 이 프로그램은 몇일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포드 안에서 진솔한 대화만을 통해서 약혼자를 찾고 약혼한 뒤 처음 얼굴을 보고 바로 신혼여행을 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가족과 친구를 만나 결혼을 설득하고 설명하고 현실적인 조건들을 타협하면서 정말 거진 한 달안에 결혼식까지 치뤄야 하는 일정을 소화하는 사회적 실험을 담고 있다. 결혼식 제단에 서서 서로를 마주본 채 주례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그동안의 경험과 유대감(connection), 현실적 상황 등을 종합하여 결혼을 할지말지 결정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말이지 나는 간접적으로 많은 감정을 느끼는데, 사랑과 끌림만으로는 결혼까지 가기 정말 쉽지 않고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며 현실적인 점(재정상태, 집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다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서로의 육체적인 끌림을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목소리만으로 소통하고 벽을 가운데 두고 가려진 상태에서 그 누구보다 어떤 때보다도 더욱 진실되고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와 자라온 역사, 꿈, 취향 등을 드러내고 진솔된 대화를 하여 고른 약혼자라는 점이 특이점이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계속 사회자가 "Is Love truly blind?"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도 만약 이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모든 여정의 끝에 무슨 대답을 하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계속 나오는 단어가 바로 "vulnerable"이다. 출연자들은 계속 자신은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에게 취약해본 경험이 없고 나를 드러내는 취약성이 약하다고 묘사하면서 이 과정 속에서 거절받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면서 상처를 소화하기 위해 애를 쓴다. 출연진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바는 사랑은 취약해야지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어찌보면 내게는 조금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취약할 줄 알아야 하고, 나의 방어기제가 너무 강하고 스스로의 약한 부분을  상대에게 내보일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듯 하여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나온 20대 연애지침서나 요즘 나오는 연애 관련 몇몇 유튜브들을 봐도 서로의 약점과 취약성을 가리고 숨기고 완전한 모습만을 보여주면서 결혼에 성공하라는 듯한 말들이 종종 보이고  또 들려온다. 괜히 서로나 서로의 가족의 약점을 잡혀서 좋을 것이 없고 나의 약점을 상대가 알게 되면 언젠가는 그것이 책이 되어 공격받을 수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어 알려주었다면 이를 웬만해서 서로가 건드리지 않도록 피해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공격받더라도 이를 막아주고 품어줄 수 있는 게 사랑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받을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이 모습까지도 사랑해주기를 기대하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고 취약성인 것이 아닐까? 사랑에 대해서는 내가 너무 낭만적이고 판타지스러운 기대를 가지고 있는건가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상처없이 오래오래 영원히 행복했다는 그런 판타지가 아니라, 상처를 주고 받더라도 이 또한 서로 덮어주고 병주고 약주면서 그렇게 서로의 취약성을 온통 드러내고 온통 안아주는 그런 게 사랑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취약한 것이고 아름답고도 아픈 것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그런 인간관계와 사랑을 꿈꾸고 품고 있다. 친구관계든, 부모-자식관계이든, 연인관계이든지간에 서로 취약해지고 그 모습 그대로 부딪혀 아파도 했다가 결국에는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다시는 상처받지 말아야지했다가도 금세 취약해져서 상처받고 그리고나서 또 서로 위로하고 사과하면서 그렇게 다채롭게 취약하고 진솔한 관계가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완벽하고 형식을 지켜 만나면서 아무 갈등도 없지만 아무 감정도 없는 그런 취약성 없는 관계는 오래 가기 힘들고 내 마음건강을 오히려 해치기도 한다고 믿는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내가 너무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내어주고 상처받고 힘들어한다고 걱정하며, 좀 더 방어기제를 세우고 경계하며 신뢰가 아니라 불신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주기도 한다. 물론 나도 너무 말랑말랑한 상태는 나를 지킬 수 없기에 적절하게 나를 지키고 보호할 정도의 방어막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불신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고 꽁꽁 닫힌 마음으로 취약성을 내 안에만 담은 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닌 것 같다. 역시 인간사의 모든 것은 '조화'와 밸런스가 아닌가 싶다. 너무 취약해서도 안되지만 너무 방어적이어서도 안 좋은 그런 것.


사랑과 우정, 유대감, 연대감, 소속감 등을 위해서는 취약해질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취약성과 진실성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강한 것이라는 나의 가치가 담겨 있는 듯 해서 그렇다. 모두에게 취약해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취약해질 용기 한 조각 쯤은 진짜 나의 인연이 왔을 때 꺼내어 보일 수 있도록 내 마음 안에 지니고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빈 자리에 남는 것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