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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는 왜 사랑을 말하지 않는가

다윗의 고백과 노자 도덕경을 중심으로

by 뉴욕 산재변호사

우리는 흔히 “어머니를 사랑한다”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내뱉지만,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입술에 오래 머물다 사라지곤 한다. 많은 문화권에서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경외와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이자 법이었고, 때로는 심판자와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의 사랑은 품고 돌보며 다가오는 온기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 온기에 맞추어 익히게 된다. 반면 아버지의 사랑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며, 때로는 침묵 속에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 생계를 위해 나가고, 자녀들은 그 뒷모습을 통해 사랑을 느낄 수 있었지만, 정작 언어로는 포착하기 어려웠다. 그 사랑은 말보다 무거운 책임의 형태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종교적 상상력과도 맞닿아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전통에서 사람들은 경외와 순종을 먼저 떠올린다. 실제로 믿음의 조상들이 보여준 태도는 대부분 그러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고향을 떠났고, 모세는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 앞에서 신을 벗고 엎드렸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복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직접적인 고백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시편 18편 1절에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이 말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친밀한 관계의 선언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만 모시던 시대에,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담대히 말했다. 믿음의 조상들이 보여준 순종 위에 다윗은 사랑의 고백을 더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층 깊은 차원으로 열어 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성경 속에 이미 하나님의 어머니적 이미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젖 먹이는 여인에 비유했고(사 49:15),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에 빗대셨다(마 23:37). 중세 신비가들은 예수의 사랑을 “어머니의 젖과 같은 양육”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현대에는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로도 비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성별에 제한되지 않은 분이므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미지가 모두 하나님의 풍성한 성품을 드러내는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권위와 두려움 속에 가둘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머니처럼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위로와 돌봄, 친밀함 속에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의 고백은 이 두 이미지를 아우르는 출발점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사랑의 대상으로 불렀고,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칭하셨다.


이러한 시각은 노자의 도덕경과도 맞닿아 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끊임없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지혜를 전한다. 밝음과 어두움, 강함과 부드러움, 남성과 여성은 서로 반대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짝이다. 제42장은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음을 지니고 양을 끌어 안아, 화합하여 조화를 이룬다.”


노자에게 있어 우주는 대립이 아니라 상호의존 속에서 생명을 낳고 유지하는 질서였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권위, 정의, 보호를 떠올리게 하고, 어머니의 이미지는 돌봄, 위로, 양육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둘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 어느 쪽에도 제한되지 않으시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품을 모두 품으시는 초월적 존재이시다. 이는 도덕경의 음양 사상처럼 두 개념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온전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만 이해한다면 그분의 사랑을 권위와 두려움 속에 가둘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을 어머니로만 이해한다면 위로와 친밀함은 얻을지라도 거룩한 경외를 놓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징을 모두 아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온전하게 만날 수 있다.


노자의 음양 사상과 기독교 신학은 서로 다른 전통에 뿌리내렸지만, “조화와 온전함”이라는 지점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은 단일한 색이 아니라, 빛과 어둠, 강함과 부드러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함께 지니신 무지개와 같다. 우리의 신앙은 그 무지개를 바라보며, 부분이 아닌 전체로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여정이다.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언어로만 그려져 있던 관계를 사랑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행위다. 침묵으로 이어져 온 세대 간의 간격을 좁히고, 권위와 사랑이 함께 서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길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언어 모두를 통해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 온전하고 풍성하게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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