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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첩 묻은 왕관, 혹은 21세기의 진정한 군주론

by 뉴욕 산재변호사

한 나라의 대통령이 다른 나라의 지도자에게 금관 왕관을 선물하는 장면만큼 역사적 무게감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까. 한국을 방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재명 대통령으로부터 금빛 왕관을 선물로 받았을 때, 그 순간만큼은 권위와 상징의 아우라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엄숙함은 저녁 식탁 앞에서 무너졌다.


손으로 들고 먹는 쇠고기 패티, 그리고 그 위에 흥건히 뿌려진 캐첩. 격조 높은 만찬 대신,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대중적인 취향이 담긴 그 메뉴를 두고 한 미국 코미디언은 재치 있게 선언했다. “드디어 트럼프는 진정한 버거킹이 되었다.


왕관과 햄버거. 가장 무거운 상징과 가장 가벼운 일상이 충돌하는 이 장면은, 21세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을 던진다. 왕이란 무엇인가? 왕관을 쓰는 것만으로 왕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미국인들이 외치듯, 우리는 정말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물론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게 세습되거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왕은 필요 없다. 미국인들이 외치는 "왕은 필요 없다"는 구호는, 시대착오적인 군주제에 대한 거부이자 모든 국민의 평등한 주권을 선언하는 외침이다. 하지만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직위로서의 왕이지, 인간의 영혼이 갈망하는 ‘주체성’으로서의 왕좌는 아닐 것이다.


왕관을 쓰는 행위가 권위를 부여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왕좌는 외부에 있지 않다. 진정한 왕의 자리는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즉 ‘나 자신에게 왕 됨’이라는 고독하고도 찬란한 주권 속에 있다. 성경이 선언하듯, 진정한 군주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Lord)이 나의 왕이 되실 때 비로소 참된 자아의 해방이 시작된다. 나 자신을 다스리는 주체성은, 내가 절대적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선한 분께 그 왕관을 맡기고 그분의 뜻을 따름으로써 얻는 고결한 자유가 되는 것이다. 이 영적인 복종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세속적 욕망과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힘을 얻는다. 영적인 복종은 외부가 아닌 내면의 왕으로서 자신을 통치하는 행위이기에, 결국 스스로를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 자신에게 왕이 된다는 것은, 금관의 무게를 견디는 대신, 삶의 방향키를 스스로 쥐는 것이다. 이는 외부의 조건이나 끊임없이 변하는 유행, 혹은 솟구치는 본능과 욕구, 혹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의해 끌려다니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고, 화나면 소리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즉각적인 본능이다.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잘 보이고자 불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드센 태풍처럼 우리를 휩쓸어 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본능의 노예로 산다. 달콤한 유혹 앞에서 굴복하고, 불편한 진실 앞에서 눈을 감는다. 캐첩 범벅인 햄버거처럼, 당장의 만족을 추구하는 쉬운 길을 택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왕이 된 사람은 다르다. 그는 태풍의 중심, 고요한 눈(Eye of the Storm) 속에서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을 내린다. 충동적으로 소리치는 대신 잠시 멈추고, 손쉬운 쾌락 대신 장기적인 가치를 선택한다. 그의 길은 때때로 외롭고, 지름길이 아닐지라도, 묵묵하게 자신의 깃발을 꽂고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수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와 나귀를 타고 홀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듯이, 진정한 '왕도(王道)'는 본디 고독한 길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받은 금관은 단순한 상징물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찬 메뉴로 캐첩 묻은 쇠고기 패티를 고집했을 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이라는 왕국의 주권자임을 선언한 것이 아닐까? 모두가 정찬을 기대했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고 그를 따름으로써,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형태의 자기 결정권을 보여준 것이다.


진정한 왕관은 무게를 자랑하는 금속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작은 선택들—유혹에 대한 저항, 나태함에 대한 주체적인 의지, 그리고 자신만의 길을 걷겠다는 고독한 결단—을 통해 직조된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외부 세계의 소란스러운 요구인가, 아니면 우리 내면의 조용한 왕좌에서 나오는 주권적 판단인가? 진정한 왕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주권을 행사하도록 허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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