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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운백년 Dec 05. 2023

이런 종류의 헛헛함



오늘은 하루 종일 속이 헛헛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것처럼 무언가 텅 빈 상태였다. 먹을 것을 아무리 채워 넣고, 재미있는 영상이나 드라마를 온종일 주입시키듯 봤지만 정작 머릿속에 들어온 것은 없었다. 뇌의 어느 부분에 구멍이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 그대로 헛헛했다. 머릿속이 헛헛한 느낌이라고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기분이었다.


주말 중 최종 출력파일을 인쇄소에 넘겼다. 표지와 내지를 각각 개별 PDF파일로 만들었고, 가제본을 3번 뽑으면서까지 수십 번은 더 확인했다. 표지를 만들면서도 글자를 이리 넣었다 저리 넣었다, 또 크기를 줄였다 키웠다, 결정장애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게 나아보이기도 하고, 저게 나아보이기도 하고.. 무엇이든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더 최선인 것처럼 보이는 시기를 지났고, 결국 12월 안에 책을 내기 위해 내가 정해둔 마감기한이 다가왔다. 더는 미룰 수 없을 때쯤이 되어서야, 나는 최종 출력파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합리화 또는 포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완성을 했다.


월요일 그러니까 오늘 오전에는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다. 표지 파일에 수정사항이 있었다. 표지에 넣은 이미지를 날개 부분까지 조금 더 빼달라는 요청이었다. 오전부터 비몽사몽인 상태로 인디자인을 열었고, 곧바로 인쇄소의 요청에 따라 표지 파일을 수정했다. 표지 파일을 보내고도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수정사항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표지 파일에 더는 이상이 없을지, 내지에서도 수정할 부분이 나오진 않으려나, 인쇄는 잘 되려나, 아무런 문제 없이 책 인쇄가 무사히 끝나려나… 이런저런 우려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인쇄소에서 확인용 PDF 파일을 보내줬다. 파일을 확인해 보고 이상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지만, 나는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보낸 파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여기서 무엇을 더 해야 하지? 곧장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 다행히 독립출판 선배님들이 많은 덕분에, 확인용 PDF 파일을 열어서 내가 어떤 것들을 확인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였다. 혹여나 오타가 있거나, 글자가 깨지는 현상, 이미지가 누락되는 현상 등… 인쇄에 들어가기 전 오류를 잡아낼 수 있는 정말 정말 최최최최최종 기회라는 느낌. 떨리는 마음으로 표지와 내지 파일 모두 여러 번 검토한 뒤 인쇄소에 전화를 걸었다.


“파일 확인했고, 이상 없습니다. “

“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사무적이고 간결한 통화를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 앉아 있었다. 정말 끝인가..? 처음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배고픔이 몰려왔다. 속이 허한 기분. 아, 배고프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니터에 커다랗게 뜬 표지와 내지 PDF 파일을 차례대로 닫은 뒤, 인디자인 파일도 차례차례 닫았다. 빈 모니터 화면에서, 인터넷을 켜서는 괜한 메일함이나 블로그 등을 잠깐 들여다봤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끝나선 안 될 것만 같은 기분.


점심을 과하게 먹었고, 후식으로 달달한 과자를 챙겨 먹었다. 그런데도 속이 헛헛했다. 이유 모를 배고픔이 하루종일 따라다녔다. 온몸이 힘이 쭉 빠지고 말아서, 나는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기로 결심했다. 매 장면에 피가 튀기고, 죽음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하루종일 시청했다. 문득 살아있다는 감정이나 죽는다는 감정에 무감각해지는 듯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기분. 그저 텅 빈 것만 같았다. 이런 기분은 뭘까.


첫 책의 원고를 준비하던 때는 뭣도 모르던 시기였다. 뒤늦은 치기 어린 열정 덕에 자신만만했다. 불안했지만 이유 모를 희망이 넘쳤다. 퇴고를 거듭하다가 결국 탈고라는 마침표를 찍었을 땐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책이 나온다! 자꾸 바라지 않아도 될 희망이 눈앞에 떠다녔다. 얼마 안 가 희망을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인쇄소에 파일들을 모두 넘기던 순간, 그 모든 감정들이 출력파일에 휩쓸려 어디론가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할 것들이 많았다. 포장지나 홍보자료들도 필요했다. 독립출판이기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 그러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버려진 감정을 주워오기 전엔 영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책을 내고 얼마간 글태기에 빠진다는 여러 작가를 만났다. 아 나도 그런 시기인 걸까. 그렇게 누구나 겪는 시기를 나도 겪는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고작 책 한 권 내보고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좀 건방진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다만 나는 오늘 하루종일 느낀 헛헛함을 얼른 무엇으로든 채우고 싶었다. 너무 많은 힘을 빼버린 건 아닐까. 책이 나오면 그때부터 재고와 길고 긴 싸움(?)의 시작일 텐데. 힘을 비축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이런 종류의 헛헛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막막하지만, 결국 글이 그걸 채워주지 않을까. 좋은 글을 읽고 좋은 영상을 보고 좋은 음악을 듣고, 또 내 이름이 적힌 첫 번째 책이 정말로 눈앞에 탄생한다면, 그리고 그게 우리 집 어느 곳을 가득 채운 재고로 눈앞에 자리한다면, 아 그땐 나도 다시 달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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