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DDY May 09. 2022

불안한 아빠와 느린 아이의 동행

천이백번째 밤. 간헐적 외사시

브런치 작가로 등록되고 4개월여가 흐르는 동안, 한 편의 글도 제대로 투고하지 못했다.


나는 대체로 그런 사람이다. 조금을 너머 꽤, 아니 대단히 그럴 듯해야 하고, 내 기준에는 완벽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내보이지 못하는 그런 사람. 그런데 또 노력은 그만큼 안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이번 주 읽은 보도 섀퍼의 '이기는 습관'이라는 책에서는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다는 내용이 나온다. 내가 타인에 대한 평가에 다소 인색하고, 장점보다는 결점을 먼저 보는 시야를 가지고 있기에 나 스스로에게도 그런 게 아닐까.


고백하건대 브런치 작가 심사 신청할 때 포부도 되게 거창했던 것 같다. 나중에는 그냥 '쓰기만 하면' 통과되는 구나, 하고 김이 샜지만. 혼자 민망한 기억이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난관은 꾸준히 써나가는 것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한 사람, 두 사람이 들어주더라도 해나가는 것.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해나가는 것. 어설픈 글로 풀어낸 부족한 이야기를 용기있게 털어놓는 것.


새삼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대단했다.

나는 꾸준할 자신이 없어서 첫 걸음을 못 떼었던 거다.

그래서 오늘 충동적으로 첫 걸음을 떼보고 싶다.


===================


우리 아들 '도치'는 40개월이다.

여러 부분에서 발달이 느리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조금만 같이 지내다보면 느끼게 되는 지점이 있다.


난치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는 사람처럼,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여러 전문가를 만났다.

누군가는 어쩌면 영원히 느릴 수도 있다고 했고,

누군가는 성장하며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되도록 낙천적인 마음을 먹는 것이 아이에게도 좋다고 했지만 아이를 두고 주사위를 굴릴 수 있는 부모가 많을까.


게다가 아빠인 나는 매우 불안하고 예민한 사람...

이란 것을, 도치를 만나고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이의 대근육이 문제없음에도 12개월 무렵부터 의심했고, 의사들이 너무 이르다는 말에도 꿋꿋하게 불안해하다가 24개월 무렵 기관으로부터 소견을 받았다. 


그 이후로 한 동안,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무섭고 불안하고 초조했다.


사실은 지금도 때때로, 불쑥불쑥, 불안이 찾아온다.


아이를 키우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건 그보다

조금은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부단히 공부하고, 치료도 다니고, 치료사가 되기도 하고, 안간힘을 쓰다가도 어느새 아이가 그래도 크긴 큰다는 것에 감동하고, 때로는 크게 아픈 곳 없는 아이에게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아 지치기도 하면서


그렇게 비범한 듯 평범한 육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아이와 함께 조금씩은 성장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지내왔다. 버텨왔다.


그러던 중 다시 나를 불안의 수렁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도치는 눈맞춤이 잘 되지 않는 편이다.

사실 이것이 모든 불안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조금 더하여, 늘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정면에 있는 사물도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본다.

사물을 거꾸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는 경우도 많다.

다른 이들에게는 귀여운데, 나에게는 계속 불편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웃으며 이야기 할,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어린 시절의 버릇일지, 발달장애의 징후일지. 안달내봐야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그리고 최근 그게 '간헐적 외사시'의 징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한쪽 눈동자가 바깥 쪽으로 돌아가는 사시가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이다.

다른 이에게는 생소한 이 질병이 나에게는 익숙하다.


성장기의 나를 오랜 시간 괴롭힌 질병이기 때문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알고 있다.

때때로 내 왼쪽 눈동자가 바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대체로 멍할 때나 피곤할 때, 갑자기 눈동자를 움직일 때, 눈을 오래 감았다 뜰 때. 눈의 초점을 풀 때 그렇게 된다.


크면 나아지겠지라는 마음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안대를 차고 다녔고, 결국 교정에는 실패했다.

집의 경제적 사정으로 소소한 치료는 흐지부지 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내 안에서는 흐지부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 방법을 알아

보았다. 

하지만 수술이 부담스럽고 위험하니 지금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그냥 살라사의 말은 날 체념시켰다.

사실 그 때는 이미 더 이상 큰 불편함이 없었다.

나만의 오래된 숙제일 뿐이었다.


어린 또래 남학생도, 몰지각한 사람들도, 체육 시간도

성인이 된 내 주변에는 이미 없었기...


그러나 사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 그 사이에 이 문제는 나를 꽤 힘들게 해왔다.


가끔 보이는 모습을 눈치 챈 몇몇 또래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워낙 운동 신경이 부족한 나에게 입체감이 없는 것은 큰 핸디캡이었다. 남자 아이들의 생태계에서 운동을 못하는 아이가 받는 취급은 생각보다 가혹했다. 그리고 나는 예민하고 소심한 아이였다.


아이를 가지기 전부터 유전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머니가 지나가듯 '너가 어릴 때 조금 더 신경써야 했다'는 말을 한 것도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발달장애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도무지 그 가능성까지 살필 여유가 없었다. 발달이 느려서 드러나는 모습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관련 증상임을 알게되자 처음 발달장애를 의심할 때처럼 불안이 크게 치솟았다.


나처럼 불안도가 높은 사람들은 공감할 지 모르겠다.


필연적으로 밟게되는 수순이 있다.

증상을 검색하고, 우리 아이와 비교하고, 병원을 알아보고, 치료 예후를 찾아보고...

처음에는 잘 몰랐다는 이야기,

전신마취를 해야해서 아이가 많이 괴로워했다는 이야기,

수술 예후가 좋지 않아 내사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

그리고 이런 정보들을 구겨넣으면서 힘들어하기.


생각을 바꿔보면 참 못난 호들갑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접하게 되는,

타인의 육아 푸념을 듣고 느끼는 생각처럼...

별거 아닌 일.


지금 아이의 눈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대단치도 않은, 오히려 부러운 상황일 수도 있다.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면,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니라면...그 자체로 사소한 일일 수 있다.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나는 가장 불행한 미래만 골라서 그리고 있었다.

종종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자조하지만

아이 걱정만큼 중독되기 쉬운 일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아이도 나처럼 힘들어지면 어떡하지?

우리 아이가 나보다 심하면 어떡하지?

전신마취 수술을 해야하면 어떡하지?

수술이 실패하거나 예후가 안좋으면 어떡하지?

왜 내가 닮지 않길 바란 부분을 닮았을까?

왜 나에게,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


글로 써보니 숨이 턱 막힌다.

나의 불안은 꼬리가 길다...


나이를 먹으며 얻게 된 위안 중 하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한 평범한 사람'이 꽤 드물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아가 힘들 때마다 세상에 평범한 육아 역시 그만큼 흔치 않은 거라는 마음으로 버티곤 했다.


아이를 다 키우신 분들이 종종 우스개로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미리 힘들고 부모로서 성장하는 만큼 다음 문턱은 '쪼끔은 더 쉽게 넘겠지' 하는 기대감.

크게 아프지 않은 게 어디야, 지금 몸 건강한 게 어디야, 살아서 뛰어놀고 웃는 게 어디야. 하면서 위안을 삼았던 간사한 감사함.

나약한 나를 다잡으며 차곡차곡 쌓아놓은 마일리지들.


그런데 이럴 때면 시야가 바늘 구멍보다 더 좁아지고 세상이 온통 까매졌다.


온갖 불행한 미래를 다 예상하는 나는

감히 우리 아이가 꽃길만 걸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이 험해진다면 내가 업어주거나, 같이 걸어주거나, 하다못해 멈춰서 안아주거나.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준비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파하고, 아파할 아이를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줄은 몰랐다.

아이에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게 되었다. 어쩌면 너무 늦게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2년 간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며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있다. 내가 지금 당연하게 느끼는 것조차 당연한 게 아니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큰 보상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진 좋은 점들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터널을 좋아하는 우리 아들은 터널이 지날 때면 다시 '낮이 되었어요!'하기를 기다리고 즐긴다는 것.


나는 눈 때문에 때때로 사팔뜨기라고 놀림을 받았다.

운동을 못해서 체육 시간이 늘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편을 가르다보면 어느새 마지막까지 뽑히지 않고 남았다.

멍하니 있을 수가 없어 항상 과도한 집중력으로 피로했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특히 눈에 긴장해야 했다.

갓 성인이 되었을 때는 전혀 내막을 모르는 친구들이 '너 방금 눈이 이상했어' 라고 하면

'그랬어?' 라고 웃으며 대꾸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초조했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는 선까지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운동은 잘 못하지만 이제는 원하지 않는 운동은 하지 않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학창시절은 괴로웠지만 덕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배려해 준 친구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적절한 긴장감은, 워낙 머릿속이 부산한 내가 상대에게 집중하도록 도와주었다.

사실은 제가 이런 질병이 있어요, 하고 말을 꺼내는 여유도 생겼다. 약점을 보이면, 나와 상대의 담이 얕아지는 기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때는 일생일대의 문제였던 일이, 어느 순간부터 사소해지는 일을 이미 많이 경험했다. 게다가 확률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예후를 보인다.


그리고 도치에게는 도치가 겪을 어려움을 조금 더 잘 이해해 줄 아빠가 있다.

운동을 못하면 못하는 대로,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면 혼자인 채로, 도치를 받아들이려고 지금부터 매일 연습하는 아빠가.

그러니 지금 치솟는 불안은 잠시 치워두자.

명심하자.

살아있는 것 자체로 큰 보상이다.

.

.

.

22년 5월 9일 씀.


=======================


나를 잘 아는 만큼, 내가 쉽게 변하지 않는 것도 잘 알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자기 합리화가 며칠이나 갈 지 모르겠다.

그래도 글로써 이 불안을 조금이마나 흘려보내려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