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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여사 Oct 31. 2021

나나랑 하미랑

(*나나 - 손녀 나은의 애칭)



‘나나, 하미랑 산책 갈까?’

‘… …’

‘나나, 하미랑 산책 갈래? 아이스크림 사줄게.’

‘좋아.’


TV에 정신이 팔려 들은 척도 않던 손녀는 단박에 답했다. 나는 당황했다. 장난삼아 미끼를 던졌는데 덥석 물줄이야. 그렇게 단 둘만의 첫 데이트는 성사되었다.         


나와 손녀는 서로의 손을 잡고 아파트 일층 현관을 나섰다.

‘나나, 하늘 봐봐. 너무 예쁘다! 봐봐, 바다에 섬들이 떠있는 거 같다!’

‘하미, 저기 솜사탕도 있어!’


나와 손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하미, 멧돼지 놀이터 가는 거야?’

‘맞다. 나나 전에 저기 갔었지.’     


잊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오늘은 오전 열한시를 지나고 있지만, 그 날은 해가 서녘에 걸쳐 있을 때였다. 나와 딸과 손녀는 이른 저녁을 먹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놀이터를 보자 그곳에서 놀기를 고집하는 손녀 때문에 손녀와 딸은 놀이터에 남기로 했고, 나는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였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영상 통화였다. 화면은 어두웠고 손녀는 제 엄마 품에 숨듯 안겨 있었다.  

‘어디야? 빨리 와. 멧돼지 나왔어. 우린 정자에 있어.’

딸은 작은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뭐라고? 멧돼지? 괜찮아?’  

‘응, 괜찮아. 기다리고 있을게. 조심히 와요.’

‘하미, 메때지 와떠요.’

손녀는 울먹였다.   

‘나나, 하미 빨리 갈게 엄마랑 꼭 안고 있어요.’     

걷는데 열중했던 나는 그때야 주변을 살폈다. 공원은 이미 어둠에 싸여 있었다. 나는 경보하듯 숨을 헐떡이며 딸과 손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괜찮아? 멧돼지는?’

‘갔어.’

‘나나 무서웠어요? 이제 괜찮아. 하미가 멧돼지야 나나 집에 가야 하니까 빨리 집에 가라고 했어요.’

‘어두워지니까 나나가 무서워해서 정자에서 엄마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소리에 민감하잖아. 갑자기 저쪽에서 스스스슥 소리가 들리길래 보니까 멧돼진 거야. 내가 작은 소리로 멧돼지에요! 라고 했는데도 사람들이 듣고 놀래가지고 여기로 달려오고, 어떤 아저씨가 전화 걸어서 관리 아저씨오고 경찰 오고.’

‘공격은 안 하디?’

‘새끼여서 그런지 공격은 안 하더라고. 나나, 엄마랑 나나랑 진짜로 멧돼지 봤지?’

딸은 진저리를 쳤다.


그때가 일 년 전이라니, 정말로 세월이 빠르다.


‘하미, 지금은 멧돼지 없어?’

‘없지요.’

‘왜?’

‘멧돼지는 낮에는 코 자고 밤에 일어난대.’

‘왜?’

‘하나님이 멧돼지야, 너는 낮에 코 자고 밤에 일어나라! 라고 하셨대.’

나는 말문이 막힐 때마다 지금처럼 –하나님이 가라사대-를 써먹는다.

‘왜?’

‘하나님이 낮에는 나나가 놀아야 하니까, 멧돼지 너는 밤에 놀아라, 라고 하셨대.’

나는 손녀가 또 왜? 라고 할까 봐, -하나님이 가라사대-를 준비했는데, 손녀는 ‘저기 놀이터다!’ 라고 외치더니 내 손을 놓고 놀이터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나나, 여기서 놀고 싶어요?’

‘응.’

‘그래, 그럼 여기서 놀다가 저기 하미가 산책하는데도 가 보자.’

‘응.’

‘하미, 우리 미끄럼 같이 탈까?’

‘나나 혼자 타면 안 될까?’

‘힝, 같이 타고 싶은데.’

‘하미도 같이 타고 싶은데, 하미가 늙어서.’

‘알겠어.’

손녀는 서운한 표정으로 혼자 미끄럼틀로 갔다.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평생을 몸 쓰는 걸 싫어했던 터라, 몸이 선뜻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 후에도 손녀는 놀이 기구를 갈아 탈 때마다 - 하미 같이 하자. -라고 했고 나는 같은 핑계를 반복했다.       


가을볕은 꽤 따가웠다. 놀이터에 그늘이 없다 보니 손녀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나, 우리 그늘 있는 저기로 갈까?’

나는 숲을 가리켰다.

그 숲은 꽤 울창하다. 예전에는 이곳이 다 산이었는데 건설사들이 앞다퉈 아파트를 짓는 바람에 일부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도 건설사 측에서 아파트 주민과 지역주민들을 위해 공원과 산책로를 조성해 주었다. 덕분에 요즘 이곳은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저기가 하미 운동하는 데야?’

‘응.’

‘알겠어.’      

나와 손녀는 이번에도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숲 입구에 도착하자, 싱그러운 가을바람이 나와 손녀를 맞아 주었다.     

‘아! 시원하다!’

‘아! 시원하다!’

손녀는 가을바람에게 얼굴을 내어 주며 따라했다.

‘나나, 까치가 나나 안녕! 하는데?’

나는 까치 소리를 찾아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있다. 나나도 까치야 안녕! 해줄래? 까치가 좋아할 거 같은데.’

‘까치야, 안녕!’

‘나 하미랑 산책하고 올게. 이따 만나. 라고 하면 까치가 알겠어. 라고 답해준다.’

‘하미, 까치는 말 못해.’

손녀는 하미는 그것도 몰라 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맞아. 근데 까치는 소리로 말해. 나나가 먼저 말 해 봐.’

‘나 하미랑 산책 다녀올게 이따 만나.’

‘깍 깍 까각 깍깍!’

나는 까치 대신 답했다.

‘들었지? 까치가 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 기다릴게. 이따 만나. 라고 하는 소리.’

‘근데 하미.’

‘왜?’

‘아이스크림은 산책한 다음에 사는 거야?’

손녀는 내 얘기가 별 재미없는지 자기 마음 속 이야기를 꺼냈다.   

‘응. 산책하고 집에 갈 때 살 수 있어. 나나도 알지? 아이스크림 가게가 집 가는 데 있는 거.’

‘알겠어, 하미.’

서로의 손을 잡은 나와 손녀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나나, 이거 뭔지 알아?’

‘도토리!“

‘와! 우리 나나 모르는 게 없구나.’

‘유치원에서 봤어.’

‘우리 도토리 주워 갈까?’

‘좋아.’

나와 손녀는 허리를 굽혀 길 주변을 살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도토리다 싶어 주우려고 하면 깍정이만 남았다.         


열흘 전 즈음부터 산책 중에 도토리를 줍는 이들을 많이 봤다. 아예 배낭을 메고 참나무만 찾아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도토리로 배낭을 채우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재미로 걷다가 눈에 띄면 잠시 허리를 굽혀 주우며 한 주먹, 또는 겉옷 주머니에 가득 채워 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 이들은 알까? 본인들이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 도토리를 먹이로 삼는 동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 많던 도토리는 누가 다 먹었을까?’

‘다람쥐!’

‘나나, 청솔모 본 적 있어요?’

손녀는 나를 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람쥐처럼 생겼는데, 다람쥐보다 조금 더 크고, 털색은 음 …….’

나는 순간 청솔모는 털색이 청색이어서 청솔모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네** 님께 여쭤 보니, 여름털은 등이 붉은 갈색, 겨울털은 잿빛 갈색이다.)

‘오늘은 왜 청솔모가 없지? 다른 날은 청솔모가 도토리 먹으려고 나무를 막 타고 올라갔는데. 아쉽다.’

‘하미, 도토리는 다람쥐가 먹는다니까.’

‘맞아 맞아. 산골짜기 다람쥐이 아아기 다람쥐이 도오토오리 점심 가지고 소오풍을 간다 다람쥐이야 다람쥐이야 재에주우나 하안 버언 넘으려엄 파알딱 팔딱 팔딱 아이고 자알도 넘는다아.’

‘하미 그게 뭐야!’

손녀는 나의 트로트 버전에 까르륵 까르륵 소리를 내며 숨이 넘어가게 웃어댔다. 나도 손녀를 따라 웃었다. 우리는 한참을 웃다가 마주보고, 웃다가 마주보고를 반복했다.          




          행복하다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에게 행복해!

          라고  외쳤다     


          행복은 머어얼리 있지 않다

          이 순간 행복하다 느끼면 행복은 여기에 있는 것을       


          굳이 행복의 무게를 저울질 할 필요도 없다

          행복에 무게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한 이 순간을 붙잡으려도 하지 말자

          이 순간이 가고

          다시 올 이 순간에도 다시 행복하면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이


          저어기 길모퉁이 돌아

          이미 과거인 이 순간이었던 순간에게

          눈물을 보이고 만다


          가지 마 돌아 와!

          

          내겐 너와 함께 했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단 말이야!




‘하미, 뭐해? 울어?’

‘아니. 음 도토리가 어딨나? 나나, 누가 먼저 찾나 할까?’

‘좋아.’

손녀는 길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와! 여기! 도토리 있다!’

‘하미, 내가 먼저 찾고 싶었는데.’

손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이거 나나 줄까?’

‘좋아, 하미 그럼 내가 일등이다!’

‘당연하지, 나나 도토리 가방에다 넣자.’  

‘그래.’

손녀는 물과 여분 마스크가 들어 있는 미니 에코 가방에 도토리를 넣었다.


‘나나, 방금 좋은 생각이 났어. 우리, 도토리랑 솔방울이랑 나뭇잎이랑 주워다가 사람 얼굴 만들까?’

‘와! 신난다.’

손녀는 토끼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뛰기를 반복했다.

‘그럼 눈 만들 도토리부터 한 개 더 찾을까?’

‘좋아. 하미 너무 재밌다!’

‘나도.’

‘여깄다!’

‘이번에는 솔방울.’

‘응’

‘솔방울이다!’

‘오케이! 솔방울은 코니까 하나면 되겠다.’

‘알겠어.’

‘이번에는 입술 만들 나뭇가지.’

‘오케이!’

신이 난 손녀는 산책로 주변을 토끼마냥 깡총깡총 뛰어 다녔다.  


‘여기, 가지 찾았고, 이번에는 귀 만들 나뭇잎 두 장.’

‘하미, 여기 있어!’

‘오케이. 나뭇잎 부서지지 않게 조심해서 넣어.’

‘알겠어 하미. 근데 하미, 우리 너무 재밌는 거 아냐?’

‘와! 우리 나나 진짜 많이 컸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그럼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만들 솔잎!’

‘여깄다!’

‘오케이. 나나, 봐봐. 솔잎이 두 개씩 붙어 있지? 이게 한국의 소나무 잎이야.’

‘대한민국?’

‘맞아. 대한민국.’

‘하미, 그럼 대한민국이라고 해야지.’

‘한국이 대한민국이야.’

‘하미, 내 말 잘 들어 봐. 우리 유치원에서, 응, 응, 우리 대, 한, 민국, 응, 응, 우리가, 대한, 응, 민국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야.’

손녀는 자기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고 답답했는지 급기야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나나, 하미 말 잘 들어 봐. 대한민국에 한과 국이 들어 있잖아. 그러니까 한국도 맞는 거야.’

‘하이 참!’

나나의 눈가가 붉어졌다.

‘미안. 하미가 미안. 나나 말이 맞아.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이야.’


나는 다시 걷기 위해 손녀의 손을 잡았다. 손녀는 많이 서운했는지 내 손을 반기지 않았다.      

잠시 뒤, 내가 반환점으로 정해놓은 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둥치를 어루만졌다.  

‘하미 왜?’

‘인사 하는 거야. 하미 여기 올 때마다 이 나무한테 나 왔어요. 라고 인사한다. 나나도 해볼래?’

손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하미 따라 해 봐. 잘 지내고 있어요. 또 올게요.’

‘잘 지내요, 또 올게요.’

나와 손녀는 마주보고 웃었다. 나나의 얼굴에서 서운함이 사라졌다.


‘나나, 자 그럼 이제 우리 빠르게 걸어 볼까? 아이스크림 사러 가게!’

‘오케이! 하미! 준비, 렛츠 스타트 해야지!’

나와 손녀는 달리기 선수가 출발 지점에 서있는 모습으로 섰다.

‘자, 준비! 렛츠 스타트!!!!!’

손녀는 뒤도 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당연히 걸었다.      


‘나나, 힘들지 않아?’

손녀는 저만치 서서 뒤 처져 걷는 나를 기다려 주었다.

‘괜찮아. 근데 살짝 다리가 아프다.’

‘그러니까, 뛰지 말고 하미처럼 걸어.’

‘아니야, 쉬니까 괜찮아.’

손녀는 거리가 가까워지자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넘어져요. 천천히!’

손녀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에서 토끼처럼 뛰기와 쉬기를 반복했고 나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야기 결말과는 달리 손녀가 승리를 거뒀다.      


집에 도착한 후,

‘나나, 다음에 또 하미랑 산책 갈까?’    

손녀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고? 하미랑?’

‘응. 근데 하미, 내가 다리 아플지도 모르니까, 집에서 하는 건 어때?’



나나의 미니 에코 가방
도토리, 솔방울, 나뭇잎으로 하미와 만든 나나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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